프랑스 소녀의 이야기
【그들의 말 혹은 침묵】

노벨문학상 '아니 에르노' 작품

by 글로

아니 에르노, 민음사, 2022 (2022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부모


수학이 8점이라며 안을 밀어붙이는 엄마,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으면 공장에서 인생 종친다고 딸을 협박한다.


‘난 그녀가 싫었다’


안은 엄마를 내내 ‘그녀’라고 부른다.


‘식사하는 동안 그 문제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댔다. 그들에게 휴가도 생피에르 축제도 없고 마치 현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다. 늘 직업, 교육, 장래만을 향해 돌아가는 고개. 그런 생각이라면 두 발을 모아서 곧장 미래로 도달했음이 확실해질 때까지 날 가둬 두는 게 낫지 않았을까. 조금 늦었다고 그런 야단법석을 떠는 모습을 보면, 혹시 날 가둬두는 게 그들의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는 ‘안’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존재로 그려진다. 현실을 즐길 줄 모르고 대단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부모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내면에서는 많은 말들이 쏟아진다.

특히 우리 나라처럼 부모와 자식이 교육적인 측면에서 부지런을 떨어야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어느 나라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사랑하는 만큼 편한 관계는 아니구나! 이야기 속 ‘안’도 부모와의 관계가 친밀하거나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는 작가의 말을 들어서인지 글의 모든 상황과 ‘안’의 말이 더욱 현실적으로 들렸다.


-정체성


‘왜 늘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날, 그런 의문이 들었다. 왜 다른 곳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왜 다른 가족이 아니라 이 가족일까. 움직이는 내 두 발, 보도, 세자린 거리의 주택들. 개나 닭은 집을 틀리는 법이 없는데, 우리도 그들처럼 해야 되기 때문일까? 그래도 왜 나와 그들일까, 다른 부모가 아니라 나의 부모일까.’


초등학생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자신과 환경을 객관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이 그랬다는 것이리라. 부모를 객관화 시켜서 생각해보고 비교하고 판단하는 일련의 사고과정을 겪는다. 불만을 가져서라기 보다는 어떻게 우리가 부모와 자식이 되었는지 궁금한 것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상의 비밀, 진리가 알고 싶었던 걸까?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아이, 그 가정을 볼 때 '왜 나는 지금의 부모를 만나고 이 가정에서 형제들과 살고 있나?’ 하는 아주 엉뚱하고도 현실적인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 했을 것이다. 본인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숙명 앞에서 때로는 원망하고 좌절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주인공 ‘안’은 부모에 대한 우연성도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다소의 불만이 있었기에 왜 나는 이 집으로 꼭 돌아가야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졌으리라.



-성(性)


‘안’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로 올라가기 전 대학생 ‘마티외’와 첫 경험을 한다. 이야기의 근간에는 ‘안’의 성에 대한 관심,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깔려있다. 미지의 세계를 알고 싶은 한 소녀의 궁금증이 이야기 곳곳에 흐르고 있다. 마침내 호기심이 해결되고 이전과 이후의 삶을 사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이론적으로는 지금 죽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몇 십년 전 중학생 시절에 ‘테스’라는 영화의 키스신을 보고 가슴 뛰게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이후로 제대로 된 성에 대한 지식과 경험 없이 어른이 되어버렸다. 소설 속 ‘안’은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다. 끊임없이 궁금증을 표현하고 거부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마치 자신이 어른의 세계에 입문한 듯 군다.


나는 ‘안’과 비슷한 나이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지? 오로지 시험 점수와 친구 관계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나갔던 미팅에서 얼마나 얼굴이 새빨개졌는지 고개도 들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인생이 짧다고 하지만 때론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랬던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한 남자와 오래 살고 있는 것이 때론 낯설게 느껴진다. 한참 잊고 지냈던 학창시절도 떠오르고 그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딸들의 성장과정도 다시 떠올랐다. 부모는 최선이라고 하며 자식들을 가르치고 교육하지만 딸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주인공 ‘안’의 냉소적인 여러 가지 생각과 말처럼 나의 딸들도 그랬을거라 짐작한다.


급기야 ‘안’은 다음과 같은 생각도 한다.


‘이젠 어머니가 떠나버린다면, 죽어버린다면, 그만큼 좋았으리라. 어쨌든 내 머릿속에선 이미 그녀로부터 떠났으니까. 난 안경을 식탁 위에 놔두고, 처음으로 다투다가 나가 버리는 용기를 발휘했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청소년 시절의 혼란과 아픔, 고통을 세밀하게 그린 소설이다. 주인공 ‘안’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을법한 소녀다. 겉으로는 평범하고 모범적이고 학업에 몰두하지만 내면세계는 복잡하고 냉담하다. 세계에 순응하는 듯 보이지만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질문하고 부모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른이 되어 어린아이들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이런 과정 없이 어른이 되는 사람은 없다. 발효없이 구워버린 빵처럼 사고가 딱딱할 것이다. 여러 가지 복잡미묘한 과정을 거쳐야 사고가 말랑말랑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닐까? ‘안’의 심각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때론 귀엽게 느껴지기도 하고 다소 낯설게도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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