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여행 마지막 날, 돌아가는 열차가 오후 6시라 시간이 충분한데도 마음이 여유롭지는 못하다. 멀리 가기는 그렇고 해서 수산시장 구경을 가자고 했다. 호텔에서 나와 뚜벅 뚜벅 걷다 버스를 탈까 말까 고민만 하고 있었다. 정해놓은 약속도,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으니 조금 더 주변을 구경하자고 했다. 걷다 보니 조선소가 보인다. 배를 뒤집어 놓고 보수를 하는 모습이나 용접하는 모습이 신기한지 남편은 열심히 쳐다본다. 우리가 이런 구경을 언제 하겠냐며. 내가 하는 것과 다른 분야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의 모습은 신선하고 그 자체로 아름답다.
그렇게 걷다가 발견한 카페, ‘하얀 파도’는 길가에 있다. 바다가 코앞이고, 건물 전체가 하얗다. 3층 건물인데 1층에 앉았다. 레몬티와 바닐라라떼 한잔을 놓고 호들갑을 떤다. 바다를 앞에 두고 차를 마시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창으로는 온통 바다다. 양쪽에서 배들이 출항하고 앞에는 작은 섬도 있다. 섬을 빙 둘러 걸을 수 있게 길도 다져 놓았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늘 그렇듯이 다음을 기약했다. 카페가 뭐길래. 여수여행에서 본 것 중 제일을 꼽으라면 이 카페를 말할 거 같다. 남편도 그렇단다. 오래간만의 합일이다. 관광지도 아니고 유명한 곳도 아니며 핫플도 아닌 신상 카페. 나는 이 카페와 전혀 관련이 없는 지나가다 들른 손님일 뿐이다. 호텔 부근 동네에 있는 하얀 건물. ‘커피나 마실까?’ 하고 우연히 들른 이곳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렇게 여행에서는 대단한 것이 기억에 남는 게 아니고 작은 것들이 하나의 장면으로 머릿속에 각인된다. 약 20년 전 동생과 독일 뮌헨을 여행했다. 기억에 남는 건 호텔 밖 창문으로 내렸던 비다. 왜 그 비가 그렇게 특별했을까? 그곳이 평소 가고 싶었던 뮌헨이었기 때문이다. 비가 나라마다 다를 리는 없다. 뮌헨에서 한여름 서늘히 내리던 아침비가 왜 그렇게 가슴을 적셨던지. 한참을 바라본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홍콩에서 기억나는 건 어느 로컬 식당이다. 오래전 여행이지만 그 식당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의 장면은 마치 정지 화면처럼 머릿속에 남아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현지인들로 가득 찬 식당의 분위기가 잊히지 않는다. 특별할 것 없는 식당이 스틸사진처럼 머리 속에 저장된다. 역 근처 뒷골목에 자리한 현지인들만 아는 홍콩식 밥과 면을 파는 평범한 식당. 작고 일상적인 것들도 여행자에게는 특별한 것으로 다가온다.
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신게 뭐 특별하냐고 하겠지만 그날 그때 그곳은 우리 부부에게 인상 깊게 다가온다.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부부가 갑자기 떠난 여수,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만난 지중해풍의 카페건물. 실내는 하얗고 밖에 보이는 풍경은 온통 푸른 하늘과 바다, 작은 섬과 물 위를 떠가는 배.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아도 좋았다. 서로의 어려움과 오해, 비난과 불평이 모두 녹아내린다. ‘이래서 서운했고 이런 게 불만이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발길 닿는 대로 걸을 때마다 오해는 매듭 풀리듯 풀렸다. 맛있는 걸 먹으며 감탄할 때마다 불만은 저절로 해소 되었다. 그래서 여행이 필요한가보다. 미리 검색해 온 바다가 잘 보인다는 카페도 있었지만 우리는 이곳 ‘하얀 파도’로 대만족이다. 이곳보다 더 좋은 카페는 여수에서 못 찾는 걸로 내 마음에 정리하고 그곳을 맘껏 즐기다 나왔다. 다음에 또 올 거라 다짐하며.
이슬아는 ‘아무튼 노래’에서 남동생에 대해 말한다.
가족이어도 다 알 수가 없다.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는 나랑 너무 닮은 미지의 타인이다. 모르면서도 너무 애틋한 타인이다.
여기서 그는 남동생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남편을 떠올린다. 그동안 남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고 닮으라고 요구했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은 가장 가깝지만 미지의 인물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다. 또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 없다. 최대한 가까워지기 위한 효율적인 방법은 새로운 곳을 함께 가보는 거다. 우리는 그 여행을 통해 함께 하는 아름다운 추억을 쌓아가며 서로의 거리를 좁혀간다. 그런 희망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