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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Jul 08. 2024

아수라의 산물

일가단란

자다가 벌떡 깼다. 누가 얼음 한 바가지를 얼굴에 붓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서 깬다. 자다가 놀라는 증상으로 한 번씩 이렇게 깨고 나면 몸에 기운이 빠지고 모든 것에 의욕이 사라진다. ‘열심히 살았는데 겨우 남은 건 이런 건가?’ 허무가 찾아온다. 


육아와 일로 늘 신경이 곤두서 있는 나는 남편에게 신경질을 많이 부렸다. 나의 신산함을 얘기하는 것이 대화의 레퍼토리가 되었다. 분위기를 어둡고 우울하게 만들기도 하고 어린아이처럼 칭얼대기도 했다. 결정을 내 위주로 끌어가려고 주장했다. 넛지 같은 좋은 방법도 있지만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대화하다 보면 어느새 울고 있다. 그런 내 모습이 못마땅한지 남편은 화를 내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다. 둘이 붙어있기 좋아하고 즐거운 얘기만 했다. 화도 내지 않고 싸우지도 않았다. 싸운다 해도 남편이 늘 미안하다고 먼저 말하고 나를 공주 대하듯 했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반복해서 화도 내고 자꾸 눈물을 보이니 남편이 지쳤는지 욱하면서 화를 냈다. 작가 김훈은 ‘연필로 쓰기’라는 작품에서 말한다. ‘전쟁은 본래 논리가 아니라 아수라의 산물이다.’ 그렇다. 부부의 말싸움도 전쟁이다. 아수라가 따로 없다. 내가 얘기를 하면 남편이 화를 낼 걸 알면서도 똑같은 주제와 분위기로 남편을 몰아갔다. 남편도 비난받는 것이 싫으니 똑같이 화를 내며 대화를 단절했다.  

    

학생을 가르치듯 혼내듯 남편한테 화를 냈다. 끝까지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어느 날 처음에는 좋게 시작을 했다가 되풀이되는 주제로 얘기가 진전되었다. 남편은 컴퓨터 앞에 앉아 소주를 맥주잔에 연거푸 부어 마셨다. 이런 일은 아주 드문 경우이다. 많이 취했다. 속은 끌탕이지만 건드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든다. 그러더니 ‘안동역에서’라는 노래를 튼다. 그 노래를 10번 정도 따라 부른다. 술 취한 남자의 ‘안동역에서’. 조이는 마음을 안고 거실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그러더니 소리 없이 엎드려서 잔다. 그러면 안 되는데 저녁 8시쯤 일어나더니 동네 사우나에 간다. 사우나 건물은 1층에 마트가 있다. 나는 사우나까지는 들어갈 수가 없어 마트에 살 것도 있고 하여 그 건물 바깥 주차장에 갔다. 다행히 남편 차가 있다. 사우나에 있는 것이다. 나는 문자를 보냈다. ‘미안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집으로 오세요’ 남편도 화해의 답변을 보내온다. 이렇듯 미안하다고 해야 할 때, 먼저 손을 내밀어야할 때는 적절히 양보하며 살아온 듯하다.    

 

‘친애하는 미스터 최(사노요코, 최정호저)’에서 사노요코가 최정호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중국에 망명했던 일본의 공산당 간부가 조금 전에 귀국했습니다. 그는 신념과 사상을 위해 가족을 버리고 30년 가까운 세월을 중국에서 보내고 몸도 마음도 몹시 지친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한 첫마디는 일가단란(一家團欒)을 즐기고 싶어서 돌아왔다는 말이었습니다. 신념도 사상도 늘그막에 일가단란을 즐기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는 못한 거예요. 그의 아내는 30년 동안 아이를 지키면서 살아 왔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사상도 신념도 아니고, 생활이 아닐까요? 

    

젊을 때는 자신의 뜻한 바를 따라 꿈을 펼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무리해서 유학도 가본다. 그러나 결국 나이 먹어 바라고 원하는 것은 따뜻한 가정이라는 것이다. 배우자와 아이들이 있는 가정. 그것만이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는 시스템이 아닐까 싶다.미우나 고우나 살을 부비며 또 가끔 싸워대며 일상을 살아가는 동반자인 남편이 고마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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