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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Aug 27. 2024

TV를 없앤 이유

'읽기 시작하다'

집에 TV가 없다고 하면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TV 놓을 자리에 책장이 있다고 하면 더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자기들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실천으로 옮기기가 어렵다고 한다. TV없는 거실, TV없는 저녁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반응들이다. 중학교 3학년때 아빠가 흑백 TV를 사오셨다. 그 이후로 집에는 당연히 TV가 있어 시청생활은 지속되고 TV없는 생활은 상상해본 적 없었다. 결혼하고 큰딸이 5학년 되던 해 갑자기 TV를 없앴다. 따지고 보니 26년간 TV를 본 셈이다. 볼 때는 즐거웠는데 ‘남는 것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해보면 허무하기도 하고 시간낭비였다는 생각도 든다.   

  

노래를 좋아해서 ‘가요톱텐’, ‘토요일, 토요일밤에’등을 즐겨보았다. 연말에 하는 시상식은 그 당시 온국민의 관심사였다. ‘10대 가수상’ 대상자에 우리 가족 중 누가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온 신경을 곤두세워 누가 선정되는지 지켜 보았다. 재미없는 야구를 틀어놓는 통에 지루한 주말을 보낼 때면 오빠가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그때는 특별한 재미거리가 없으니 TV시청이 유일한 취미생활이자 오락거리였다. 친구도 별로 없고 어디 갈 돈도, 그러겠다는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쑥맥이었다.    

  

일종의 중독을 간단하게 끊어낼 때도 있다.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 사람이 없으면 죽을 거 같지만 죽지 않는다. 공기가 있으니 숨을 쉬며 살아간다. TV가 없으면 심심할 거 같지만 그 자리를 다른 무언가가 채우기 마련이다. 조직에서도 핵심적인 인물이 다른 곳으로 옮기면 곧 망할 거 같지만 그런대로 잘 굴러가는 것처럼.      




설거지하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사극만 계속 보는 남편이 미웠다. 개인적으로 느린 흐름의 사극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 똑같이 일을 하고 왔어도 부인인 나만 집안일에 발을 동동 구르며 힘들어하는 것에 화가 났다. TV를 없애고 한 달간은 네 식구가 저녁을 먹고 나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허전해하며 안절부절했다. 감옥에 갇힌 듯, 누가 ‘시간 보내기’를 숙제로 내 주기라도 한 듯 어려워했다. 집중해서 시청을 하지 않아도 TV화면은 늘 켜져 있어야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것처럼 상실감을 느꼈다. 마음도 불안하고 이걸 언제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저녁 먹고 아이를 씻기고 집안일을 마쳐도 잠들기 전까지 한 두 시간 가량이 남았다. 이 시간에 집중적으로 TV를 시청했었는데... TV를 없애고 할 것이 없으니 책을 잡게 되었다. TV가 없으니 취침 전 할 거라고는 책 읽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없어 손에 잡히지 않던 책. 읽어야 할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했던 책. 그렇게 책 읽기는 우연히 시작 되었다. 처음에는 겨우 한 달에 한 권 정도 읽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 달에 두 권, 세 권. 일 년에 20권, 30권으로 늘어갔다. 읽고 싶은 책이 넘쳐났다. 




전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눈길도 주지 않던 책들인데 이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 권을 마치기가 무섭게 관련된 다음 책이 읽고 싶어졌다. 물건을 사는 것보다 책을 사는 것이 더 마음이 뿌듯하고 기대되었다. 쇼핑몰마다 대형서점은 들어서고 그곳에 가면 뷔페 앞에서 행복한 고민을 하듯 눈과 마음이 즐거웠다. 이곳저곳 책 몇 권을 늘어놓고 병렬독서를 하기도 했다. 가방에는 항상 책을 휴대하고 차 안에도 한 권씩은 꼭 비치해 두었다. ‘TV 없이 어떻게 살아?’가 아니라 ‘책 없이 어떻게 살아?’의 삶이 된 것이다.   

  

식사할 때도 읽고 자기 전에도 읽었다.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누워 있는 대신 책을 읽었다. 오지 않던 잠이 솔솔 찾아왔다. 조금씩 읽다 보면 어느새 한 권이 끝나있다. 책 읽기에 맛 들여 남편과 같은 책을 읽고 둘이 대화를 나눈 적도 있다. 남편과 깊은 얘기를 하는 건 무리라며 지인들이 말렸지만 우리는 등산을 할 때도 카페에서도 책에 대한 내용으로 대화를 했다. 영혼의 단짝이라도 만난 듯, 둘 사이에 없던 고속도로라도 뚫린 듯 끝도 없이 얘기를 이어나갔다.  

    



둘만 읽는 것이 아까워 온 식구가 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연말을 맞기 한 두 달 전 책을 한 권 정한다. 토론(?)은 송년회 날 하기로 했다. 큰딸 생일이 12월 31일이다 보니 생일파티와 송년회를 동시에 길게 한다. 짧게는 3시간 더러는 더 길게 시간을 함께 보낸다. 각자 마실 거리도 준비하고 특별식도 마련해 넷이 둘러앉는다. 

     

제일 어린 딸이 읽기 쉬운 것으로 골랐다. '특이한 서점을 모아놓은 동화책'이었다. 서점에 관한 얘기인데 감상은 360도 다방향으로 뻗어나갔다. 딸 둘의 독후 감상을 들으며 딸들의 생각과 미래 희망을 자연스럽게 듣게 되었다. 하기 껄끄러운 얘기도, 물어보기 주저되는 질문도 책이라는 매개를 통하니 그렇게 쉬울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서로 얘기하겠다고 하며 신나서 마음 속 얘기를 꺼내고 털어놓았다.    

  



먹고 노는 망년회도 좋지만 책을 매개로 해서 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가족끼리 무슨 책 얘기냐고 할 수도 있지만 책은 가족을 더 끈끈하게 묶어준다. 영화 한 편을 같이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책 한 권을 함께 읽고 공유한다는 것은 정신 세계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는 느낌이다. 자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학업에 집중하다 보니 책 읽기가 숙제처럼 되어버려 이어가지는 못했다. 책 말고도 아이들이 보아야 하는 텍스트가 너무 많았다.     

   

요즘은 핸드폰으로 뉴스도 볼 수 있고 유투브로 온갖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으니 TV를 다시 거실에 놓기가 망설여진다. 누구 하나 TV를 사자고 얘기하지 않는다. TV를 잘 활용하면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무료한 시간을 달랠 수도 있다. 먼 나라로의 여행을 손쉽게 체험해 볼 수도 있다. 그러다가도 어쩌다 시댁에서 많은 채널의 홈쇼핑과 반복되는 광고를 보면 바보가 되는 기분이 든다. 잘 보던 프로그램이 갑자기 끊기고 생뚱맞은 광고가 나올 때는 맛있게 먹던 아이스크림이 땅에 떨어진 듯 허망하고 다시 볼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잘 활용해서 도움을 주는 필수품으로 만드는 건 보는 사람의 몫이니 어떤 물건이든 다루기 나름이다.  

   

그렇게 시작된 책 읽기와 책 사랑이 2024년 6월 등단으로 이어졌다. 쉽게 결정한 ‘거실에서 TV 없애기’가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 꿈에도 몰랐다. 그때 TV를 없애지 않았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TV 리모콘 대신 책을 잡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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