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하던 수강 신청은 무사히 끝났다. 친절하게 설명을 잘 해주었다. 한 학기에 두과목, 화요일과 목요일에 수업을 듣는다. 수업시간은 두 과목 모두 오후 4시반에서 7시 반까지 3시간이고 필수과목이다. ‘영어교육의 이론과 실제’, ‘교육과정과 평가’ 두 과목이다. 아침 9시에 큰 강당에 모여 인터내셔널 학생들은 비자와 컬쳐쇼크(?), 텍스파일 넘버등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컬쳐쇼크 강의는 언뜻 보면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살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한민족이라 외국인을 볼 기회가 별로 없지만 이곳은 외국인 천지다. 아랍인과 동양인들이 많다. 거리나 다운타운, 학교에도 많으며 내가 함께할 영어교육과 학생들은 대부분이 외국인이다. 서로의 문화가 다르니 어떻게 상처 안주고 받아들이며 잘 지낼 것인가에 대한 기본 예의를 배울 수밖에 없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겹치다 보니 갈등이 있거나 몰이해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다 배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인드세팅만 해보는 것이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을 머릿속에 필터로 하나 넣어놓고 타인을 이해해야하는 것이다. 자기의 것만 맞다고, 옳다고, 정석이라고 주장하면 사이는 점점 벌어지고 멀어지고 결국 서로 손해를 보게 되어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공부를 하러 왔지만 학위도 못받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된다.
기숙사에서 나와 살게 된 중국인 집주인의 딸 탬을 통해서 들은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3살 때 아빠를 따라 호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단다. 오랜 세월 호주에 살았지만 탬도 이해 할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의외로 레즈비언들이 많다는 것이다. 파티에 가면 여자들끼리 키스하는 장면을 꽤나 볼 수 있는데 탬은 그런 문화들이 적응하기 힘들다고 얘기했다.
한 번 더 옮긴 쉐어하우스에서는 여러 가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 집에서는 세 명이 함께 살았다. 집주인이 있고 따로 집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다. 내 예상대로라면 집주인은 관리인에게 돈을 조금 주고 모든 관리를 맡기는 형식이다. 이 관리인이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다.
학기가 끝날 때마다 나는 한국으로 들어왔다. 방학 때마다 한국으로 들어가 가족과 3개월을 머물다 다음 학기를 공부하기 위해 호주로 돌아오는 식이었다. 이럴 때마다 이 관리인이 공항 픽업을 해주었다. 전기세, 수도세 외에 꼬박꼬박 내야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잔디깍는 비용이었다. 월세에 이런 건 포함되지 않아 따로 내야했다. 어이 없지만 현실이다. 여러집을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 잔디깍는 비용을 내야한다는 것도 적잖은 컬쳐쇼크였다.
박사과정을 하는 호주 현지인 여학생과 대학을 다니는 남학생, 그리고 대학원을 다니는 나 세 명이 각각 방 하나씩을 사용했다. 제일 신기했던 건 이들은 방문을 잠그지 않는다는 거였다. 중국인 부부 집에 있을 때는 방을 잠그고 다녔다. 함께 머무는 사람들을 의심 한다기 보다는 습관대로 한 것이다. 그런데 호주인들과의 쉐어하우스에서는 그들이 문을 잠그지 않으니 나도 잠그지 않게 되었다. 잠그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열고 다닌다. 방안이 훤히 다 보이도록 개방해 놓고 다니는 거다. 처음에는 어찌나 적응이 안 되던지.
한번은 키가 족히 190센티는 돼 보이는 남자 쉐어메이트가 샤워를 하고 아랫도리를 수건으로 가리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의 방을 지나 나의 방이 끝에 있는데 여자 친구가 놀러 왔나보다. 언제 왔는지도 몰랐는데 지나칠 때 우연히 보게 된 광경, 둘의 열렬한 키스 장면. 남들이 있는 집에서 스스럼없이 키스를 나누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애정표현이 신선했다.
이런 문화충격은 실생활에서 맞닥뜨려야 제대로 감이 오는 법이다. 함께 강의 듣는 여학생 중에는 브라를 하지 않아 유두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민소매 옷을 강의실에 입고 나타나는 사람도 있었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기색이다. 대부분의 여름옷들은 가슴이 시원하게 파여있어 입으면 가슴 절반이 드러나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가슴 노출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 나만 시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어색해한다.
강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고 경험한 것들, 실제로 본 장면만 머릿속에 남아있다. 문화충격에 대한 강의가 끝나고 즐거운 문화충격이 있었다. 점심은 피자였다. 몇 백명을 수용하는 큰 식당에 들어가니 각 테이블마다 크기와 두께가 어마어마한 피자가 가득 놓여있었다. 진풍경이 따로 없다. 스케일이 어찌나 큰지. 평소에 피자를 즐기지 않는 내가 봐도 참 먹음직스러웠다. 더구나 공짜니 얼마나 맛있었겠는가? 한 조각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학비에 모두 포함이 된 거겠지만 그때 당시에는 베품을 받는다는, 대접을 받는다는 기분이 들어 대학생활의 어려움이 쿠션 있는 맨땅처럼 말랑말랑할 것처럼 느껴졌다.
오후에는 캠퍼스 센터 근처에서 각 동아리들이 가입하라고 홍보하는 곳을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이 나이에 다시 대학생활이라니, 참 신선했다. 여유 있게 걸으며 동아리 책상에 앉아 홍보하는 학생, 거의 벗고 다니는 여학생, 말쑥한 신사 차림의 직원들, 교수님들을 보았다. 나는 ‘공부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어볼 겸 스포츠클럽에 가입할까?’ 생각했었다.
4시 30분에는 다시 교육학부 빌딩에 모여 대학원생들은 대학원과정 전체에 대한 안내와 설명을 들었다.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대학원과정에서는 나이 든 사람들이 꽤 있었고 거의 직장인인 듯 싶었다. 안내하는 스텝들도 설명을 듣는 사람들도 경직된 분위기는 별로 없다. 자리가 턱없이 모자라는데 신경 쓰지 않고 바닥에 앉아 설명을 들었다. 바닥이 카펫이니 무리는 없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 그런 사소한 광경도 이방인인 내 눈에는 컬쳐쇼크로 느껴졌다.
대학원 다니면서 학교에서 보내 주는 단체 소풍을 두 번 다녀왔다. 버스를 타고 교육학부 학생들과 교수 몇 명이 함께 멜번 외곽의 관광지를 다녀왔다. 바닷가와 국립공원을 구경했는데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는다. 안 해줘도 그만인 이런 서비스를 베푸는 것이 마음을 푸근하게 해 주었다. 영어 때문에, 학점 때문에 힘들기만 하다가도 범접할 수 없는 호주의 대자연을 보고 있으면 새로운 힘을 얻는다. 강의실이 아닌 산에서, 바다에서 동료들, 교수님들과 보내는 시간은 큰 즐거움을 맛보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