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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 박용운 Sep 20. 2022

슬픈 時代

안톤 시냐크



깊은 내면으로부터 공허함은 무섭게 밀려온다.

엉망진창 아니 뒤죽박죽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요즘은 거꾸로 가는 열차를 타고 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멈추고 화력발전소를 가동하는 것만 봐도...


눈뜨면 제일 먼저 듣던 찬송이 왜 이리 차분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예배도 이젠 대면, 비대면 하면서 드려야 하는 시대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거짓과 음모가 난무하는 시대가 나를 슬프게 한다.

부도와 실업이 난무하는 시대가 나를 슬프게 한다.

우울과 짜증이 범벅된 시대가  나를 슬프게 한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좀 더 강도가 센듯하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태어난 우리는

그리 풍족하지 못한 시대를 나름대로 지혜롭게 견디어왔다고 자부한다.

부모님 세대가 겪었던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한 보릿고개를 우리는

그저 배고픔에 허덕이며 수동적으로 견디어 온 세대이기도 하다.

또 한 산업의 발전 등을 거치며 자연스레 수혜를 입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우리 시대에서 마무리된 것으로 착각할 만큼

오랜 시간을 평안하게 지내며 안일하게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비틀스, 비지스를 좋아했고 레드 제플린, 딥 퍼플을 사랑했던 세대이기도 하다.

팝송을 외우며 영어공부를 했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두어 개쯤 외우고 다니고

버트란트 러셀의 사상을 고뇌하며 읽어야 되는 줄 알았던

그런 시대를 힘들게 보내며 살아왔다.


아르바이트로 선택했던 음악다방 DJ 생활 일 년 동안 평생 들어도 남을 정도의 음악을 들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도 젊은 날 들었던 외국 가수와 노래 제목이 줄줄이 생각난다.

아니 깜짝깜짝 놀란다.

이 실력으로 고시 공부를 했으면 분명히 패스하지 않았을까?

난 어느 날부터 글쟁이가 되는 꿈을 꾸며 살았던 것 같다.

단지 잠을 자고 있을 뿐 깨지 않았고 언젠가는 기지개를 켜며

꿈에서 깰 거라는 생각이 가슴 한편을 늘 차지하고 있었다.

한참 때 문예지나 신춘문예를 향해 열정을 태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언제인가 문학계에도 학연 지연 등 관계로 심사가 이루어진다는 신문 사설을 본 후로 깨끗이 접기로 했다.

내가 좋아 쓰는 글을 꼭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자괴감에 이후로는 원고지를 보낸 적이 없었다.

지금도 때때로 같은 생각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글을 쓸 때는 온갖 정성과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열정을 태우는데

설사 누군가 볼 때는 너무 쉽게 읽고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책상 한편에 수북이 쌓여 있는 마스크를 서랍을 열어 쑤셔 넣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되는지 막연하기만 함에 답답증이 온다.


700년 전 중세시대에 유럽을 강타했던 흑사병이 현시대에 돌아왔다.

흑사병은 페스트균이 일으키는 급성 전염병을 말한다.

6세기와 14세기, 19세기에 전 세계에 유행하였으며,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병이다.

후천성 면역 결핍증(AIDS)도 처음 발견되었을 때 20세기의 페스트라고 하였었는데

그런데 코로나19는 더욱 강력하게 무장을 한 채 21세기 최첨단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마 무시하게 찾아와 온갖 공포를 자아내고 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중에 포함된 지 오래다.


안톤 시냐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생각난다.

고등학교 때 국어시간에 배운 안톤 시냐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섬세하면서 우아한 산문의 절정을 나에게 보여주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글이 있단 말인가?

이때의 이 느낌을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교과서에서 이 글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다.

어떤 시인이 말했듯이 이 글을 읽어보지 못해 알지 못하는 요즘의 아이들이 불쌍하다.


우리나라 수필의 개척자이신 청천 김진섭(聽川 金晉燮1906~?) 선생의 번역으로 소개된 이 글은 1953년 고등국어 2학년 교과서에 실렸다고 한다.

{그에 대한 자세한 소개 글은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최 석희 교수의 논문

<한국 국어 교과서를 통해 본 독일 문화 및 독일문학의 수용>이란 글에서 따와 전재합니다.}


또한 작가 안톤 시냐크에 대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쓴 안톤 시냐크 Anton Schnack란 누구인가?

그의 이름을 어떤 독일 문학사에도 찾을 수 없었으며,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이 수필이 실려 있는

{Die Angel des Robison}(1946)라는 책을 독일 도서관에서 찾기도 무척 어려웠다고 한다.


안톤 시냐크라는 작가는 한국에서 그렇듯 많은 찬사를 받고 그의 수필이 애독되고 있는 반면에 독일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라고 한다. 그는 1892년 7월 21일 독일 프랑켄, 리넥에서 태어났으며 신문기자로 다름 스타트, 마인츠와 프랑크푸르트에서 일했다. 2차 대전 때 미군에 의해 포로가 되었으며 그 후 1973년 81세로 사망할 때까지 칼이라는 마을에서 산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훗날에야 안톤 시냐크가 나치 독일에 부역한 문학가라고 해서 그의 작품이 매우 폄하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독일의 주류 문단에서는 밀려난 작가이다. 그래도 첫사랑이라는 건 어쩌지 못한다.

우리들이 이 안톤 시냐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산문 수필을 애독하고 있을 때도 동시대인으로 살고 있었다. 칼이라는 마을은 프랑크푸르트에서 25킬로 떨어진 프랑켄에 있는 작은 마을이며, 안톤 시나크 가죽은 칼의 집에는 간호사로 독일에 갔다가 독일인과 결혼한 崔貞子 씨 일가가 살았었다고 한다.

시나크가 독일 전체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반면에 그의 고향 프랑켄에서는 알려진 작가이며 그의 생가 리넥에 '슈낙의 숲'이 있다고 한다.


이렇듯 자국에서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글이 지구 반대쪽 한 독자에 의해 소개되어 엄청난 사랑을 받는 경지에 이르렀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래서 가을날 비는 처량히 내리고

사랑하는 이의 인적(人跡)은 끊어져

거의 일 주간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옛 궁성.

그래서 벽에서는 흙 뭉치가 떨어지고 한 삭은 나무 위에

"아이시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거의 판독하기 어려운 문자를 볼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가 발견될 때,

그곳에 씌었으되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여,

너의 소행(所行)이 내게 얼마나 많은 불면(不眠)의 밤을 가져오게 했는가 ……."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혹은 하나의 연애 사건,

혹은 하나의 허언(虛言)

혹은 하나의 치회(稚戱),

이제는 벌써 그 많은 죄상을 기억 속에서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때문에 애를 태우신 것이다.

동물원에 잡힌 범의 불안(不安), 초조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철책(鐵柵) 가를 그는 언제 보아도 왔다 갔다 한다.

그의 빛나는 눈,

그 무서운 분노(憤怒),

그의 괴로운 부르짖음,

그의 앞발의 한없는 절망(絶望),

그의 미친 듯 한 순환(循環),

이것이 우리를 말할 수 없이 슬프게 한다.


횔덜린의 시,

아이헨도르프의 가곡(歌曲).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 시대의 동무 집을 방문하였을 때.

그리하여 그가 이제는 우러러 볼만한 사람의

고관대작(高官大爵)이요, 혹은 돈이 많은 공산주의 몸으로서,


우리가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操縱)하는

하나의 시인(時人)밖에 못 되었다는 이유에서

우리에게 손을 주기는 하나,

그러나 벌써 우리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같이 보일 때.

포수의 총부리 앞에 죽어 가는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 향기. 이것은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개의 노수가 선 내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 오는 고요한 음악.

그것은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밤에

모래자갈을 고요히 밝고 지나가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한 곡절의 쾌활한 소성(笑聲)은 귀를 간질이는데,

그러나 당신은 벌써 근 열흘이나

침울한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아나는 기차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것은 황혼이 밤이 되려고 할 즈음에

불을 밝힌 창들이 유령의 무리같이 시끄럽게 지나가고

어떤 어여쁜 여자의 얼굴이 창가에서 은은히 웃고 있을 때,

찬란하고도 은성(殷盛)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대의원 제씨(諸氏)의 강연 집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 공기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할 때.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십오의 약연으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는 누워 있음”이라 쓴

묘비명을 읽을 때.

아, 그는 어렸을 적의 단짝 동무의 한 사람.

날이면 날마다 항상 언제나 도회의 집과 집의

흥미 없는 등걸만 보고 사는 시커먼 냇물.

많은 교사들에 대한 추억.

수학 교과서.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아니 올 때

그녀는 병이나 난 것이 아닐까?

혹은 그 편지는 다른 남자의 손에 잘못 가서

애정이 동경이 넘치는 사연이 웃음거리로 읽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심장이 돌처럼 차게 굳어 버린 것이 아닐까?

혹은 이러한 봄밤을 다른 어떤 남자와의 산보를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첫 길인 어느 촌 주막에서의 외로운 하룻밤.


시냇물의 쫄쫄 대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속살거리는 음성이 들리며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칠 때.

그때 당신은 난데없는 예수를 느낄 것이다.

날아가는 한 마리의 창로(蒼鷺).

추수 후의 텅 빈 밭과 밭.

부인의 이취.

어렸을 적에 산 일이 있던 조그만 지방에

많은 세월을 경과한 후에 다시 들렀을 때.

아무도 이제는 당신을 아는 이 없고

일찍이 놀던 자리에는 붉고 거만한 옥사들이 늘어서 있으며,

당신의 본가이던 집 속에는 알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데

왕자같이 놀랍던 아카시아 수풀은 베어지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그러나 우리를 슬프게 하는 모든 것들이 어찌 이쁜 이랴.


오뉴월의 장의행렬(葬儀行列).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 색과 흑색과 회색의 빛깔들.

둔한 종소리.

바이올린의 G 현.

가을밭에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진 비둘기의 털.

자동차에 앉은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흘러 다니는 가극단의 여배우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광대.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처녀의 가는 손가락이

때 묻은 서류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볼게 될 때.

 만월 밤의 개 짖는 소리.

크누트 함순(Knut Hamsun)의 이삼 절.

어린아이의 배고픈 모양.

철창 안에 보이는 죄인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무 위에 떨어지는 백설(白雪)―

이 모든 것이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 청천 김진섭 역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1953년에 처음 실린 이 글은 교과서에서 사라질 때까지

전혀 문장의 첨가 내지 손질 없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고 한다.                    

1953년 3월 25일 박음,

3월 31일 펴냄,

값 110 환

지은이 겸 펴냄 문교부

되박아 펴낸이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대표자 이 구종


이 글은 나에게 산문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첫사랑이다. 지금도 이 글을 읽노라면 몸이 떨리고 머릿속에서

온갖 별들이 반짝이며 아름다운 음악이 연주되는 듯 환상적인 경험을 한다. 참 놀라워...

읽어도 읽어도 아름답고 쓸쓸하니...

안톤 시나크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을 겪으며 슬픔을 느꼈고, 

나는 작금의 답답한 시대를 살자 하니 슬픔이 가시지 않는다.

우리를 이라는 관형어를 쓰기에는  거북하고 일인칭 대명사가 어울릴 것 같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하나하나 쌓여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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