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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 박용운 Dec 20. 2022

소설가 김유정 ‘문학촌’을 가다

한국 근대 단편 문학의 선구자로 뽑히는 청풍 김유정(1908-1937)


              

  한겨울 복판에서 봄빛을 찾아 나선 길, 경춘가도는 추위로 꽁꽁 얼었다. 매서운 바람을 얹은 북한강이 그 곁으로 묵묵히 흘러가고 있다. 나지막한 구름 사이로 숨기를 반복하던 햇빛이 아예 사라져 버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발이 날린다. 청평호반·남이섬·강촌유원지를 지나 의암터널을 벗어나면 오른편으로 '김유정문학촌'이란 작은 팻말을 만난다. 그 길을 따라 5분쯤 가면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실레마을이다. 소설가 김유정, 그 쓸쓸하고 짧았던 생애를 살다 간 실레마을에 시린 바람만 빈 밭두렁을 훑고 지나가며 조용히 눈이 내린다. 실레마을에는 아직 봄이 오질 않았다


  김유정 역을 지나 마을로 약 300m 들어가면 구릉 위에 아담한 한옥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김유정 문학촌이다. 기념관으로 사용되는 기와지붕 한옥과 초가지붕의 생가, 그리고 부속건물 등이 단정히 정돈돼 있다.

기념관에는 김유정의 유품이 한 점도 없다. 김유정이 병마와 투병하다 외롭게 숨을 거둔 후 오랜 친구 안희남이 유고·편지·일기·사진 등 모두 유품을 보관하고 있다가 한국전쟁 때 몽땅 들고 월북한 탓이다. 그래도 기념관 안에 들어서면 김유정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잘 알 수는 있다. 기념관을 나서면 김유정 동상이 서 있고, 그 앞에는 'ㅁ'자의 생가가 들어서 있다. 강원도 산골 특유의 가옥구조로 건물이 사면을 둘러싸고, 가운데 마당이 있다.

 

           (김유정 생가)     

  소설가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강원도 춘천군 남 내일 작면(현 춘천시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의 명문 가문으로 고향에서도 명망 있고 부유한 지주의 막둥이로 태어났다. 그러나 삶은 처절했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에 입학해 현대식 교육받다 제적당해 귀향했을 때가 스물두 살(1930년)이었다. 연상의 기생 박녹주(朴綠珠·1906~1979)를 향한 연정(戀情)을 이루지 못한 한(恨)에다 형의 방탕한 생활로 인해 몇천 석 집안의 몰락까지 겹친 상황에서의 낙향이었다. 유정은 고향의 자연 속에서 일제강점기 가난한 이들의 생활을 담 너머로 넌지시 바라보는 일로 위안으로 삼았다. 

“지난겨울만 하여도 봄이 되어 주기를 그 얼마나 기다렸던가. 봄이 오면 날이 화창할 게고 보드라운 바람에 움이 트고 꽃도 피리라. 만물은 씩씩한 소생의 낙원으로 변할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도 보드라운 그 무엇이 찾아와 무거운 이 우울을 씻어줄 것만 같았다.

오냐! 봄만 되거라. 봄이 오면! “(김유정의 수필 중에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던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어머니와 닮은 한 여자를 만난다. 그때부터 김유정은 박녹주에게 2년여 동안 광적인 구애를 했으나, 당대의 유명한 명창이자 기생이었던 박녹주가 세 살 연하의 김유정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어두운 골방에 웅크리고 앉아 짝사랑하는 박녹주에게 절규하듯 편지를 쓰고, 밤마다 각혈하며 치료비를 걱정하는 청년에게 봄은 오지 않았다. 유부녀였던 박녹주에 대한 연사는 그를 스토커라 손가락질받게 했고 술독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형은 동생의 형편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에게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면 동네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고 소설을 썼던 고향 실레마을에서 보낸 시간, 대표작 ‘산골나그네’, ‘소낙비’, ‘봄봄’, ‘동백꽃’ 등이 실레마을 배경으로 탄생했으니 작가 김유정에게는 이곳이 영원한 봄날이 아니었을까?

                                           (박녹주)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 읍에서 한 이십 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들어 가면 내닫는 조그만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백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고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 호 밖에 못 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오월의 산골짜기’ (조광) 1936년 5월호에서)     

  문학촌에서 약 200m 떨어진 잣나무 밭 부근이 <봄봄>의 무대다. 장인은 소설 속 배 참봉댁 마름인 김봉필로 실레마을에서 '욕 필이'로 통했던 실존 인물이다. 그는 당시 딸만 여럿 낳아 데릴사위를 들여 부려 먹었는데, 집 근처는 주인공이 성례는 안 시켜주고 일만 부려 먹는 장인(봉필)과 드잡이 하던 곳이다.

문학촌에서 봉필의 집에 가려면 논과 밭 사이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지나야 한다. 이 길을 거쳐 봉필의 집 앞을 돌면 오른편으로 작은 둔덕을 이루는데, 높이가 70~80㎝는 돼 보인다. 주인공 '나'가 봉필이를 둔덕 아래로 밀어 굴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김유정은 주막에서 술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점순이와 혼례를 시켜주지 않는다며 데릴사위와 봉필과 싸우는 모습을 메모해 뒀다가 <봄봄>을 썼다고 한다.

봉필의 집에서 아래로 약 50m쯤 내려가다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면 폐가가 나온다. 김유정이 자주 들러 코다리찌개 안주로 술을 먹던 곳이다. 소설 <솥>에 나오는 들 병이 와 근식이가 장래를 약속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담 옆에 '실레마을 주막터'라는 팻말만 있을 뿐 오랜 세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는지 벽은 조금씩 허물어지고, 문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마을 그림지도 판 앞에 서니 (봄봄)의 욕 필이 장인 김봉필의 집, 주막터 등을 알리는 이정표 밑에 김유정이 수필을 통해 고향마을을 소개한 구절이 보인다. 문학촌을 둘러보고 나와 마주하니, 마치 그의 육성을 듣는 듯 친근하다.     

   (실레마을 주막터)

  문학촌 건너편 산국 농장 옆을 따라 오르면 <동백꽃>의 배경이 된 곳에 이른다. 봄이면 노란색의 꽃물결이 정상까지 이어지며 장관을 이룬다. 지금은 푸른 잎 사이로 작은 열매가 검게 익어가고 있다.     

"닭죽은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떼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몽둥이도 겹쳐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내음 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왼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소설 <동백꽃> 중에서) 

노란 동백꽃? 김유정의 소설에 나오는 동백꽃은 노랗다. 하지만 남녘의 그 붉은 동백이 아니다. 생강나무다. 꽃은 산수유를 연상시키는 노란색을 띠는데, 강원도 지방에서는 동백꽃·동 박꽃·개 동백 등으로 불린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 주게/싸릿골 올 동박이 다 떨어진다'(정선아리랑)의 올 동박은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나 까만 열매를 의미한다. 또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소양강 처녀)의 동백꽃도 생강나무다.

 김유정은 붉은 동백과 구별이라도 하려는 듯 '노란 동백꽃'이라 표현하고 있다. 강원도의 동백꽃이 생강나무라는 것을 알 턱이 없으련만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라며 향기를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산골나그네)의 물레방아 터, (봄봄)의 주인공이 화전 갈던 곳, (만무방)의 노름 터 등 소설 속의 배경이 되었던 곳들이 아기자기하게 자리 잡은 마을 지도를 보니 김유정의 소설들이 손에 잡힐 듯 떠 오른다. 술 한잔하러 들른 주막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 동네를 산책하다 목격한 광경들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하니 작가의 고향마을은 그저 ‘빈약한 촌락’이 아니라 반짝반짝 빛나는 공간으로 재탄생됐다. 이밖에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노다지> <금 따는 콩밭> <만무방> <산골> <안 해> <가을> 등의 무대도 실레마을이다. 마을 전체가 살아있는 기념관인 셈이다. 전국 문학기념관 가운데 유일하게 '촌(村)'자가 붙는 이유다.

김유정 작가는 결국 1937년 3월 29일에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삶만 보면 매우 안타깝지만 3년간의 집필 활동으로 그가 얼마나 전념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유정이 죽기 11일 전 절친 안희남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진짜 처절해서 마음이 내려앉는다.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데 돈은 없고, 그래서 무리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 닭을 30마리 먹고,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는다는 말이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다.   

  

김유정

  ”김유정의 작품세계“

  한국 근대 단편 문학의 선구자로 뽑히는 청풍 김유정(1908-1937)

  그의 소설 속에는 우울함 속에서도 여러 아이러니와 풍자를 해학적으로 표현하여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비정상적인 남녀 관계가 자주 드러나는데 그의 고단하고 가난한 삶이 투영되어 소설에 표현되는 특징이 있다. “산골나그네“, ”소낙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순수 문학을 지향했던 김유정은 이효석, 정지영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유명 작가들과 교류하며 풍부한 예술세계를 꽃피우며 일생의 역작 ”봄 봄“, ”동백꽃“ 등으로 독특한 개성을 선보여 문단에 주목받는다. “봄 봄”에서는 데릴사위의 풍속을 통해 순진무구하고 어리숙한 농촌 청년을 기만하는 모습을 해학적이고 풍자적으로 그려내며 한국적인 정서를 작품에 녹여내고 있다. 당대 소작농의 어려움을 응칠과 응오를 통해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만무방“에서는 자기 벼를 훔친 아이러니를 보여주며 1920년대 농촌의 현실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요즘 COVID19가 많이 수그러들어 해외로 나가는 여행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해외도 좋지만,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을 때 가족이나 친구들과 둘러볼 수 있는 하루 당일치기 여행으로 가볼 만한 장소인 ”김유정문학촌“ 찾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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