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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 박용운 Jan 27. 2022

하노이에서 살아가기(2)

※ 필자가 16년간 베트남 하노이에서 거주하면서 적었던 글 중에 발췌한 것이니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천년대 초반인 요즘 하노이 특히 미딘송다, 중화 등의 한인타운에는 정말로 한인 타운답게 한국 사람과 한국어 간판으로 바글바글하는 것 같다. 덕분에 자영업자들이 고생을 많이 하다가 최근 들어 살림살이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나 보다.

  간밤에 한인 사업가들을 만나 저녁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유흥의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뭐, 물 좋더군요. 오랜만에 분 냄새도 맡고 아리따운 처자의 가녀린 품속이 좋지 않아요.“

  강성 비나의 강 사장이 힐쭉이며 내뱉는 한마디에 그 자리에 모인 4명 모두 말없이 동의하듯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밤을 지새우기라도 할 기세로 놀 것 같았던 분위기는 공안이 닥쳐 흥이 싹~~~ 깨지고 억지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베트남 영원무역 법인장과 포스코 제강 법인장은 택시를 타고 먼저 떠나갔고,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강 사장과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밤거리가 많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노이 밤거리가 비교적 안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만 조금 더 긴장하고 살면 별 큰일 없을 것이라는 하노이의 밤거리가 왠지 좀 낯설게 느껴졌다. 


  뭐지? 라는 생각과 함께 부지런히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내 앞에 세 명의 건장한 남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무슨 일이야 있겠냐 하고.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전지 흥 대로(Tran Duy Hung) 중옌쪽에서 응웬티딘 쪽으로 건너기 위해서 위험한 도로보다는 안전한 육교를 택하였다. 육교 밑에서 위 상판 부분을 보니 사람들이 몇 명 더 보였다. 아는 사람들이야 알겠지만, 베트남 사람들이 육 교위에서 지나는 차 보고 소원도 빌고, 또 시원한 바람도 쐬고, 또 연인끼리 데이트도 하고 뭐. 그런 거 여러 번 봐서 그건가,,, 하고 오르기 시작했다. 아뿔싸 그런데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좀 전에 앞서가던 180cm의 건장한 세 남자가 아닌가. 

  육교 상판이 시작되는 끝부분에 이르르니 분위기가 묘했다. 사람들이 가지를 않고 제자리를 서성대고 있는 듯 보였다. 서성거리는 사람들은 검정 가죽 잠바, 청바지, 검은 모자 쓴 남자 1명, 중간에 또 다른 남자애 1명, 맨 끝 쪽에 또 1명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인 사람들만 벌써 모두 6명이다. 직감적으로 찜찜했지만. 덤덤하게 그들을 지나쳐 가다 뒷덜미가 섬찟해서 뒤돌아보니, 작달막하고 땅딸한 체구, 청바지, 검정 잠바, 그리고 검은 모자, 그리고. 취한 듯한 눈빛. 이런 녀석이 우릴 바짝 뒤 따라붙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그 주머니에 뭐가 들어 있었을까?)


  우리는 초긴장 상태로 걸으며 다시 앞을 보니 얼마 전 노래방을 덮쳤던 공안 두 명이 방망이를 휘휘 돌리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앞쪽에 있던 놈이 휴대폰에 머리를 쳐박고 있었고, 또 한 놈은 그냥 넋 놓고 지나가는 우릴 쳐다만 보았으며, 또 밑에서 올라오던 두놈은 뒤돌아 걸어갔다. 

  그래도 꿋꿋하게 걸어와 강사장과 서로 잘가라고 배웅하고 무사히 아파트까지 도착했다. 다행히 큰 사고가 없었음에 감사하고 앞으로는 짧은 거리도 걷지말고 택시를 타야겠다 마음 먹었다. 한편으로 혹시 하노이에 기획범죄가 등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일기도 했다. 물론 우리가 모르고 지나치는 사건 사고가 많지만... 언제부턴가 하노이에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루머 rumour들이 퍼지고 있었다. 


  대부분 구분 없는 우발적인 것들이다 싶었는데, 어제의 경험으로 보니, 밤 10시 넘어서 육 교위에게서 저렇게 앞뒤, 커버하고 들어오면 정말 대책 없겠다 싶어 좀 섬뜩해진다. 돈이야 없다 치면 되지만 몸을 다치게 되면 뒤에 일 들이 꼬이니 그게 큰 문제가 되는 거다. 

  대부분에 크고 나쁜 사고는, 크고 나쁜 경험이 없었던 사람들이 당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들은 잘 안 싸운다. 또 싸움을 많이 해 본 사람은 싸움을 무서워한다. 대부분 사고가 목소리 크고, 허세를 부리고, 혈기가 가득한 사람들한테 다가간다. 베트남은 여타 국가보다 치안이 아주 잘 되어있는 편이고, 거의 공안(경찰)이 모든 조직을 직할 관리하고 있기는 하다. 


  그중에서도 하노이는 사회주의의 표본이자 심장이다. 더더욱 치안이 잘 되어있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것이 지킬 것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하게 지켜야 할 것이지만, 지킬 것이 없는 지방에서 금방 하노이에 도착한 년 소득 50$ 미만의 소수민족 출신 사람들에는 지킬 것이 그리 많지 않아 무신경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렇지만 하노이에 꽤 오래 살면서 가까운 베트남 직원들이 내 것을 잠시 빌려 간 이후로 잠적하고 사라진 일도 있고, 또 아직 그 빌려 간 것을 쓰고 있는 예전 직원들도 있지만, 아직 집에 도둑이 들어와서 필요한 것을 찾아 가져간 적은 없다. 


  베트남의 로컬경제는 늘 깊고 깊은 불황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 호찌민 인근은 더더욱 심각하다고 한다. 다행히도 하노이는 SS 전자와 다른 대형 한국업체의 직, 간접적인 대규모 투자 덕분에 관련 한국업체들이 전례가 없는 호황을 누리면서 경쟁도 치열해지다. 덩달아 주변 베트남 사람들의 사업도 우리와 흥망을 함께 하고 있기는 하다.

  베트남에서 평생을 살아갈지 아니면 당장이라도 빠져서 나갈지 모르지만, 이곳에 있는 동안 튼실히 저들과 융화되는 삶을 살아야겠다. 


  동남아에 있는 베트남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서양의 라틴 문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베트남은 유럽과는 민족도, 피부색도, 문화도 전혀 다름에도 사용하는 문자의 조상이 같다. 어찌 된 것일까? 베트남은 B.C 179년부터 A.D 938년까지 오랫동안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기에 한자를 쓸 수밖에 없었다.


  독립한 다음부터는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되어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쯔놈’이란 문자가 베트남 문자의 역할을 일부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포르투갈 항해가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1498년 인도항로를 개척하고부터 유럽 상인들과 천주교 사제들이 동양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6세기부터 신부들이 베트남으로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천주교 사제들 가운데는 포르투갈 출신이 가장 많았다. 이들이 라틴 문자, 포르투갈 문자, 희랍문자를 사용하여 초기 단계의 베트남어를 표기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프랑스 아비뇽 태생의 알렉산드흐 드 호데(Alexandre de Rhodes : 1591~1660) 주교가 1651년 로마에서 <베트남어-포르투갈어-라틴어 사전>을 출판함으로써 현재 사용되고 있는 베트남 문자의 효시가 되었다. 알렉산드흐 드 호데 주교는 베트남에 라틴 문자를 소개해 준 사람으로서 베트남 문자 역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베트남 문자와 라틴 문자는 같고, 알파벳 이름이나 순서도 거의 같아서 문자의 조상이 같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베트남 문자는 모음이 12자, 자음이 17자로 모두 합하여 29개의 자모가 있다. 


  ∎54개 민족 모두가 사용하는 베트남 문자 

  베트남은 다민족 국가로 모두 54개 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전체 인구의 약 88%를 점하고 있는 낀족 이외에 53개 소수민족이 있다. 이들 소수민족 대부분은 산악지대나 고원지대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주로 수렵이나 화전을 일구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민족마다 고유의 전통문화와 언어가 있다. 베트남에는 모두 5개의 언어계통이 있고, 그 언어계통에는 민족이나 지역에 따라 수십 종류의 언어가 존재한다. 따라서 표준어로서의 베트남어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 

  같은 나라의 국민이면서 말이 서로 통하지 않으면 사소한 일에도 민족들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고,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단합하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 그래서 베트남 정부는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베트남어 교육에 많은 관심이 있다. 산악지방에는 인구가 많지 않고, 거리가 멀기 때문에 아동들이 학교에 다니기가 불편하고 위험하다. 따라서 베트남 정부에서는 청년들을 선발하여 군 복무를 대체하여 집마다 방문하여 공부를 가르쳐 주는 방문 교사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비록 인적이 드문 산악지방에 살더라도 글자를 모르는 사람의 수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많지 않다. 베트남의 문맹률이 낮은 이유이다. 


  ∎훙브엉 시대의 암각화 

  문자가 없었던 훙브엉 시대는 B.C 2879년부터 시작되었다. 베트남은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한민족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이 B.C 2333년에 시작되었으니 한민족의 역사보다 546년이나 빠르다. 훙브엉이 다스렸던 홍방시대의 나라 이름은 반랑국이었다. 이 시기는 청동기와 철기시대로, 이때도 물론 소통언어는 있었지만, 언어를 표기할 도구인 문자는 없었다. 말이 있었다면 어떤 형태로든지 반드시 문자도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 볼 수도 있겠지만, 암각화 외에는 고대 베트남 문자에 대한 흔적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한자를 사용했던 북 속 시대 

  홍방시대의 나라인 반랑국은 B.C 257년에 어우락국에 망하고, 어우락국은 B.C 179년에 남비엣에 망하고, 남비엣은 한(漢)나라 무제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B.C 179년 어우락국이 망한 이후부터 A.D 938년 독립할 때까지 무려 12세기 동안이나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12세기 동안 계속하여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아 왔으니, 당연히 중국 문자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20세기 초까지의 베트남 역사서는 모두 중국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쯔놈이 탄생했던 독립국가 시대

  ∎쯔놈은 민족자주의식의 산물 

  ‘쯔놈’이란 베트남이 A.D 938년 중국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 가까스로 독립을 달성한 이후 베트남 사람들이 점차로 자주 의식을 강하게 갖게 되었고, 자신들의 고유 문자가 필요함을 자각하게 되면서 만들어낸 베트남 문자를 말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쯔놈을 ‘국어’로 부르기도 했는데, 쯔놈의 의미는 남쪽의 글이라는 뜻이다. 중국의 한자가 북쪽의 글이라면, 베트남은 중국의 남쪽이니까 남쪽의 글, 다시 말하면 ‘우리 글’이라는 뜻이다. 쯔놈이 언제부터 출현하였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대부분 학자가 쯔놈은 북 속 시대인 8~9세기에 배태되었다가 자주독립 이후인 10~12세기에 성립되었으며, 13세기부터 발전되어 오다가 20세기 초까지 사용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쯔놈 성립기는 리(李)씨 왕조로 1009년에 나라를 세운 리(李) 태조는 1010년에 탕롱(昇龍: 현 하노이의 옛 이름)으로 도읍지를 옮기고, 4대 인종 때인 1075년에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리(李) 씨 왕조는 베트남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시작한 최초의 왕조라고 할 수 있다. 

  ∎쯔놈은 한자의 변형 


  쯔놈은 형태적으로 보면 일종의 한자의 변형이다. 따라서 옥편에서 찾을 수 없는 문자이고, 혹시 있다고 해도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북 속 시대에는 ‘불’이라는 의미의 베트남어 ‘LỬA[르어]’를 쓸 문자가 없어서 한자 ‘火’를 사용하여 표기하였고, 쯔놈 출현 이후에는 한자를 이용하여 ‘불(火)’이라는 의미에 베트남어 ‘LỬA[르어]’와 발음이 유사한 ‘려(呂)’를 결합하여 쯔놈 ‘焒(려)’를 만들어 쓰고, ‘르어’라고 읽는 것이다. 

  베트남에서는 중국으로부터 독립 이후 쯔놈을 사용하였고, 쯔놈은 비록 보편적으로 널리 통용되지는 않았지만, 베트남 문자로서의 위상을 구축해가며 발전하였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발견하고부터 유럽 상인들이나 천주교 사제들이 전도를 위해 대거 동양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6세기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부들이 베트남으로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들어서부터 가장 많은 사제가 파견되었는데, 1645년부터 1788년까지 예수회 소속의 사제들이 17개국에서 145명이 베트남으로 파견되었다. 외국인 사제들을 국적별로 보면, 포르투갈 74명, 이탈리아 30명, 독일 10명, 일본 8명, 프랑스 5명, 스페인 4명, 중국, 마카오, 폴란드가 각 2명, 기타 스위스,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여러 나라에서 각 1명씩 파견되어 천주교를 전하였다. 천주교 사제들이 오기 전부터 베트남에는 한자가 널리 통용되고 있었고, 동시에 쯔놈 문자도 사용되고 있었다. 천주교에 이어 기독교 전도가 이어지면서, 신부나 목사들은 설교나 강론을 위해 베트남어를 배우거나 자신들의 문자로 베트남어를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주교 사제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던 포르투갈 출신 신부들은 여러 지역에서 라틴 문자, 포르투갈 문자, 희랍문자를 사용하여 초기 단계의 베트남어를 표기하였다. 이러한 노력 가운데 하나가 알렉산드흐 드 호데(Alexandre de Rhodes) 주교가 1651년 로마에서 세계 최초로 <베트남어-포르투갈어-라틴어 사전>을 출판한 것이다. 이 사전의 출현은 베트남어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전은 단어 설명은 물론, 성조 표시, 품사 분류까지 한 최초의 베트남 문법책이었고, 현재 사용되고 있는 베트남 문자의 효시로 간주하고 있다. 알렉산드흐 드 호데 주교는 1624년에 베트남에 첫발을 디뎠는데, 1645년 최종 추방당하기까지 5번씩이나 추방을 당했었고, 베트남인 사제들과 함께 10여 년 동안 베트남어를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1649년 6월에 로마로 돌아와, 1651년에 <베트남어-포르투갈어-라틴어 사전>을 출판하였다. 

                         


  ∎프랑스 식민 정청에서 한자 사용 금지령

  ∎1919년 과거시험 폐지로 쯔놈과 한자 사용 사라져  

  19세기는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으로 아시아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인 시기였다. 응우옌(阮)왕조 2대 왕이었던 민망(明命)은 서양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었다.

1825년에 천주교를 금지하고, 1833년에는 8명의 선교사와 베트남 신자들을 처형하였다. 1836년 칙령에 따르면, 서양 선교사를 살해하는 것은 살인죄에 해당하지도 않았고, 선교사를 숨겨주는 자도 극형에 처할 수 있었다. 

  1847년에 3대 왕 티에우찌(紹治)는 모든 유럽인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이는 베트남 중부의 항구도시 다낭에 입항해 선교의 자유를 요구하던 프랑스 함대 2척이 베트남 해군 선박에 발포하여 침몰시킨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제4대 왕 뜨듯(嗣德) 은 1848년과 1851년에 선교사들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강화하여 1860년까지 유럽인 선교사 25명, 베트남인 사제 300명, 그리고 평신도 약 2만여 명을 처형시켰다. 

  이에, 프랑스는 군함을 보내 다낭에 정박시키고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으나 베트남 조정으로부터 거절당하였다. 프랑스 해군은 다낭의 요새에 함포사격을 가하고 철수하였다. 이때가 1856년 8월이었다. 1858년 7월에는 약 3,000명의 병력을 실은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 14척이 다낭에 함포사격을 가하고 안하이성과 똔하이성을 점령하였다. 이로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는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하고, 군대를 철수할 때까지 이어졌다. 

  프랑스 식민 정청은 1878년 4월 6일 법령을 제정하여, 1882년 1월 1일부터 모든 공문서는 물론 학교에서 라틴 문자로 된 베트남어만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프랑스 식민 정부에 의해 베트남어의 라틴 문자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1915년에는 북부, 1919년에는 중부 베트남에서 과거제도를 각각 폐지함으로써 베트남에서 한자와 쯔놈의 사용은 점차로 사라지게 되었다. 


  베트남어의 특징 

  ∎ 라틴 문자를 사용한다.

  ∎ 단음절어이다

  ∎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

  ∎ 6개의 성조가 있다 

  베트남어에는 6 성조가 있어서 외국인들이 발음하기가 쉽지 않다. 베트남어의 특징은 첫째로, 한자 문화권인 베트남이 라틴 문자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둘째로, 베트남어는 단음절어라는 특징이 있다. 발음 하나하나, 음절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말에 ‘어머니’라는 단어는 3음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베트남어로는 같은 의미로 음절 하나, mẹ[매] 하나면 충분하다. 셋째로, 베트남어는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영어, 프랑스어, 한국어 모두 시제나 단수, 복수에 따라서 형태가 변한다. 예를 들어, ‘가다’라는 기본형이 ‘갔다’, ‘갔었다’, ‘가겠다’, ‘간다’ 등등으로 변화한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단어의 꼴이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어에서는 기본형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베트남은 자신은 절대 변하지 않으면서 남을 통해서 자신을 바뀐 것으로 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는 특별한 나라다. 

  베트남어의 특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6개의 성조가 있다는 것이다. 성조가 있어 말을 할 때 발음의 굴절에 따라서 뜻이 달라진다. 성조는 음의 높낮이와 굴절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베트남어로 인사할 때, “씬 짜오(Xin chào!)” 하는데, “안녕하세요?”라는 뜻이다. 

  이때 짜오(chào)에는 모음 바로 위에, 아래로 내려서 발음하라는 표시가 있어서 내려 읽어야 한다. 발음을 잘못하여 “씬 짜오(Xin cháo!)”라고 짜오를 위로 올려 발음하면 다른 의미가 된다. “짜오(cháo)”는 모음 위에 올려 발음하라는 표시가 있기 때문에 올려서 발음하면 “죽”이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외국 사람들이 베트남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발음이 서툴러서 성사 단계의 계약이 파기되거나 노사분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베트남어는 발음만 들으면 단어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많다. 

  베트남어의 어원이나 한국말의 어원이 중국 한자어에서 유래된 것이 전체 어원 가운데 50%가 넘기 때문이다. 베트남어의 발음을 들어보면 사전을 찾지 않고도 뜻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한국은 베트남어로 ‘한꾸옥’, 미국은 ‘미꾸옥’, 기숙사는 ‘끼뚝싸’라고 한다. 다만 베트남어는 라틴 문자로, 한국말은 한글로 표기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참고 문헌 : 베트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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