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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 박용운 Feb 02. 2022

하노이에서 살아가기(3)

베트남의 첫인상

※ 필자가 16년간 베트남 하노이에서 거주하면서 적었던 글 중에 발췌한 것이니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노이에서 살아가기 (3)

    


  베트남 하노이의 첫인상은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6~70년대 대한민국의 풍경이 떠올랐다. 일단 호텔에 짐가방을 풀어내고 편안한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호텔을 나섰을 때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가 보고 싶었다. 하노이 날씨는 한국보다 훨씬 덥다고 하는데 다행히 우기라 햇볕이 많이 내리쬐지는 않았다. 흐릿한 하늘을 보았더니 미세먼지가 가득 낀 흐리멍덩한 하늘이었다.

  아마도 거리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가 내뿜는 매연들이 만들어 놓은 미세먼지가 한몫하는 듯했다. 평생 보고도 남을 오토바이를 하노이에서 다 보았다.


  하노이의 대중교통 수단 중 오토바이는 갑 of 갑이다. 건널목, 신호등도 모두 무시할 수가 있고, 지나치는 모든 차를 멈춰 세울 수 있다. 건널목을 건너는 도중 돌진해 오는 오토바이를 보고 놀라 기겁을 했다. 하노이는 한마디로 무법천지였다. 순간 하노이에서 오토바이에 치여 죽지는 않을까 생각도 해보았는데, 이내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자세히 보니 마구 돌진해 오는 게 아니라 이 라이더들은 앞뒤 좌우를 살피며 나름대로 조심 운전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무법천지가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 있었다. 막상 힘들게 끼어들면 순간 멈춰 선다. 싱가포르나 방콕을 가보았을 때 시장이나 거리에서 먹었던 기억을 되살려 하노이에도 노상에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것을 기대했는데, 몇 차례 먹을 때마다 뭔가 사기를 당했다는 느낌에 빨리 먹고 일어서다 보니 그리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노이는 3,344Km의 면적과 8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참고로 서울의 면적은 605Km와 천만 명 인구 거주) 사실 수치로만 본다면 호찌민은 800만 명이 넘는 도시일 뿐 아니라 지역 소득도 훨씬 높아 실질적으로 베트남의 경제를 이끄는 베트남 제1의 도시이다. 그런데도 하노이가 베트남의 수도인 까닭은 오래전 베트남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할 것이다.


  서울, 쿠알라룸프르, 방콕, 도쿄 등 한 나라의 가장 발전된 도시와 수도가 거의 일치하던 것을 봐왔기 때문에 호찌민과 하노이를 비교했을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중국도 북경(1,650만)이 수도이지만 상해(2,000만)의 인구가 많고, 미국도 워싱턴(65만)이 수도이지만 뉴욕과 LA가 말도 안 되게 인구수가 많다.

  베트남의 오랜 왕조가 하노이를 발판으로 역사를 써내려 왔고 교육과 정치의 중심지인 하노이가 수도인 게 무리는 아니었다. 나라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 호찌민을 경제의 중심지로 만들고 있는 게 적절한 베트남의 방향인 듯했다. 그래서 수도는 하노이, 직할시는 호찌민, 하이퐁, 껀터, 다낭 등이 있다.


  하노이의 길을 걷다 보면 호찌민과 다름이 확실히 느껴진다. 넓은 길과 매연이 덜하다고나 할까 많은 호수와 어우러진 자연 친화적인 느낌과 동시에 프랑스식 건물들 그리고 수많은 정부 기관들이 길거리에 정돈된 모습으로 서 있고 곳곳에 공안들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노이에 사는 사람은 심심해서 호찌민으로 놀러 간다고 했고 또 어떤지는 하노이가 지상의 낙원처럼 느껴진다나 어쩐다나.

  하노이의 Quang Tung Ba Dinh 공원은 호찌민이 1945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 독립을 선언한 장소이다. 그곳에는 호찌민의 대리석 묘가 있다. 베트남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자 지주인 호찌민의 유체가 밀랍 상태로 실제로 보존되는 곳이기도 하다. 하얀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총을 들고 지키고 있고, 개방 시간도 오전 시간에만 개방하다 보니 아침 일찍 가지 않으면 볼 수가 없다.


  호찌민 박물관 옆에는 한 기둥 사원이라는 못꼿사원이 있고, 호찌민 묘를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가면 황금빛 주석궁이 보인다. 하노이는 많은 박물관이 있다. 전쟁 박물관은 전쟁의 역사를 알 수 있었으나 언어의 장벽으로 깊이 알 수 없었음이 아쉬웠다.

  오랜 기간 수도였던 하노이에는 베트남 역대 왕조들의 성인 탑 롱 화서가 남아있다. 지금은 베트남 학생들의 졸업사진 찍는 장소로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또 베트남의 최초의 대학이자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역사적인 건물 문묘 文廟가 남았다. 호찌민 광장(묘)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노이에서 가장 커다란 서호가 있다. 베트남 최고의 커피전문점 하일랜드 커피 유람선이 떠 있는 곳이다. 배를 타며 커피 한 잔 꽤나 괜찮았다.


   호수 중에 서호보다 더 유명한 호 끼엠 아이 호수에 있는 300년 된 거북이를 보며 잠시 과거를 회상해 보아도 좋을 듯하다. 그 외 성요셉 성당, 바로크 양식의 오페라 하우스와 소피텔 메트로폴 호텔, 프랑스 식민 시절 베트남인들을 잡아 가두던 호아루 수용소를 이제는 공한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개관을 한 롯데 타워가 하노이의 새로운 가볼 만한 곳 1위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흔히들 하노이를 두고 볼거리가 없는 도시라고 말하고는 한다. 실제로 하노이의 대부분 볼거리는 사찰과 박물관들 역사, 정치적 건물들이어서 다소 재미는 없어 보이지만 베트남의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완벽한 도시가 아닐까? 하노이를 보지 않고는 베트남을 안다는 것은 너무 섣부른 말인 것 같다.


  베트남의 변천사 중에 공산주의 배급 주의를 타파 打破하고 변하게 된다는 도 이머 이 공약이 시발점이 된다.

도 이머 이 공약은 1986년 베트남 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 제기된 슬로건이다.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자유 시장 경제체제를 일부 도입해 효율을 높이는 것이다. 중국 덩샤오핑이 주창한 개혁개방과 유사하다. 도 이머 이는 베트남어로 Đổi mới로 쓴다. 우리말로는 쇄신이라는 뜻이다.

  베트남의 도 이머 이 Đ‽I'm, IMới는 1986년 처음 나왔다.

  처음에는 아이디어 차원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그러다가 1988년 4월 중대한 조치를 발표한다. 이른바 공산당 정치국 제10호 결의이다. 공산당 정치국 제10호 결의는 전국 농촌에서 공동으로 소유하고 함께 경작하는 인민공사를 해체하는 것이다.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각 농가가 농업 형성의 기본 단위로 독자적으로 영농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결의에 따 인민공사가 농지 대부분을 소유하고 농업 경영의 기본적 단위를 집단 농업으로 하는 시대는 끝이 났다. 가난을 나누는 교조적 공산주의에서 효율을 높여 많이 생산해 그것을 공평하게 나누는 수정 공산주의로의 일대 전환이었다. 도 이머 이 이후 농민의 삶은 변화하고 농민 전체가 훨씬 풍부해졌다.

  공산당은 농촌의 도 이 머이가 성공을 거두자 도시에도 도 이머 이를 확대해 나갔다. 시장경제 시스템을 도입하고 대외개방 정책으로 외국인 자본을 끌어들였다.


  베트남 '도 이머 이'는 응우옌 수완 와잉(Nguyen Xuan Oanh) 박사가 주도했다.

  응웬 수완 와잉(Nguyen Xuan Oanh) 박사는 1954년 미국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에서 근무한 이코노미스트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월남) 쪽으로 들어가 틔울 대통령 밑에서 부총리를 역임했다.

  1975년 베트남 공산화 이후 반동으로 몰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응엔 반 링 전 베트남 공산당 총 서기와 보 반 키엣 전 총리에게 발탁되어 경제고문을 했다. 응웬 수완 와잉(Nguyen Xuan Oanh) 박사는 특히 80년대 후반 적국이었던 미국을 여행하면서 사업가, 국회의원 등과 접촉, 미국과의 경제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기틀을 마련했다.

  와잉박사는 지난 1997년 통일 베트남 국민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 (勳四等旭日小授章)을 받기도 했다.


  우기인 겨울 한 달 동안 가랑비가 내린다.

  태양은 절대로 볼 수가 없다.

  한 달 동안 2~3번 잠시(1시간 정도) 볼 때가 있는데

  정말로 좋은 날씨라고 말한다.

  7일 동안 쉬지 않고 가랑비가 내린다.

  영상 14도 정도 되는 날씨인데 엄청나게 춥게 느껴진다.

  방 안의 온도나 밖 온도나 거의 차이가 없다.

  한국의 따뜻한 온돌방이 그립다.       

                                                                                    2016년 겨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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