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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 박용운 Mar 18. 2022

즐거운 고독

孤獨을 씹는 다는것은

孤獨을 씹는 다는것은

어쩌면 진짜 즐거운 일인지 모른다. 

'고독(孤獨)’은

“쓸쓸하고 외로움”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다람쥐 쳇 바퀴 도는 듯 한 평범한 일상속에서

가슴 한쪽 끝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일거리를 외면한 적도 수 차례

혹시 암은 아닐까? 그럴 리가 하면서

그저 계절 병인 孤獨탓이라 치부했었다.

암은 무서워하면서 孤獨은 우습게 알았나 보다. 

바바리 깃을 세우고 떨어져 뒹구는 낙옆을 밟으며 역전앞 목로주점을

찾아 한잔의 정종을 마시고 또다시 목적지 불분명한 발걸음을 옮기다

자정이 되어서야 겨우 현관문을 들어섰다.

대충 씻고는 비몽사몽으로 잠이 들곤 했었다. 


孤獨이란 놈은

밥을 먹을때도,

걸을때도,

잠을 잘때도,

책을 볼때도,

화장실을갔을때도,

심지어 여자친구를 만날때도,

孤獨이라는 놈은 잠시도 내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 孤獨을 어떻게 하면 떨어낼 수 있는지

하나님에게도 물어 보았고

선배들 한테도,

친구한테도,

여자 친구에게도,

물어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孤獨을 떨치기 위해

탁구, 테니스, 낚시, 음악 안해 본 것이 없다.


허나 그때 뿐 영락없이 잠을 자기전에 엄습해 오는 孤獨은 어마무시 했다.

이렇 듯 나의 젊은 날은 孤獨이라는 놈에게

철저히 무참하게 유린(蹂躙) 당했다. 

한 때는 철 없는 생각으로 술에 의존을 하려 한 적도 있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후회(後悔)를 했고,

사랑을 하면 괜챦을까 싶었는데 그 역시 깊은 내면에서 나오는

孤獨이라는 병을 고쳐주지 못했다. 

孤獨의 원인을 자기 자신으로 부터 소외된 상태라고 말한 학자도 있었다..

말하자면 나를 상실하므로 찾아오는 것이 孤獨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발전 된 문화 속에서 자신을 도둑맞고 살아온지 이미 오래다.

현실에 진실을 헐 값에 팔았고, 고귀한 인격(人格)마저 팔아 먹은지 오래다. 


잃어버린 나(自我)를 찾아 헤메이며

발달된 문명 속에서 로봇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음을 가끔 느낀다.

자연히 인간은 孤獨할 수 밖에 없다.

孤獨의 또 한 가지의 원인은 믿을 만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므로 孤獨한 것이다.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고 열심히 사랑할 대상을 찾을 때만이 孤獨하지 않을 수 있다.

삶의 의욕을 가지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괜챦지만 하지만 그것도 잠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孤獨 할 수 밖에 없다.

自我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결국 절망(絕望)한다는 것이고,

스스로 철창에 갖힌 신세가 되어 당당히 세상에 맞설 수 없게 된다.

종국에 인간은 孤獨하게 된다는 것이다.


치유할 수 없는 병(病)중에 가장 무서운 病이 孤獨이 아닌가 싶다.

키에르케골이 말한 죽음에 이르는 病이 絕望도 있지만 孤獨도 자리한다. 

인간은 원래 孤獨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고 철학자 “하이데커”가 말했다.

태어날 때부터 갖고 사는 孤獨이라는 놈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지 말라는 것이다.

주어진 삶 속에서 순리대로 사는 것이 孤獨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이라고 했다.

안타까운 현실은 절대로 인간은 孤獨과는 거리가 먼 존재(存在)이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 동물로서 부모로 시작해서 형제, 친구등 관계를 갖고 태어난다.

원시시대부터 부족사회 씨족사회를 이루며 살아왔기에 사실은 孤獨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孤獨과 우울(憂鬱)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더 많아진게 현실이다.

여러 학자들이 孤獨에 관하여 원인과 치유를 할 수 있는 논문들을 많이

발표했지만 나의 생각은 단순 명료 하다.

사람도 많아지고 세상은 엄청 복잡해졌지만 그 속에 믿음이 사라진지 오래다.

진정한 사랑마저 없어져 버렸다.

진짜로 없어진 것은 아닌데 방법을 잃어가고 있다. 

대신에 자리 잡는 것은 절망(絕望)과 불신(不信)이다.

덕분에 늘어나는 신종 문화가 있다.

혼밥, 혼술 참으로 상상도 못하던 지지리 궁상이 중심으로 자릴 잡고 있다.

흔한 말로 혼자 이 세상에 나왔다가 혼자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읇조린다.

결국엔 그냥 孤獨을 껴안고 살아 간다는 뜻 이기도 하다.

내가 아는 孤獨은 센치해지고 로맨틱 해야하는데

그런 것은 오간데 없고 인간들의 신뢰의 단절속에서 오는 것이

孤獨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그것은 孤獨이 아니고 이기주의(利己主義)가 팽배해지다 보니

나 이외는 별 관심이 없고 남이란 존재감 자체마저 상실된채 살아가는 모습이다.


주어진 현실이 전부(全部)일 뿐이다.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되지"라는 식의 삶이다.

학문이나 도덕적 윤리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다

그렇다고 이런 것을 죽는 그날까지 갖고 간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인간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새삼스레 잃어버린 학문이나 도덕, 윤리를

살며시 끄집어 내며 孤獨을 말하고 싶어한다.

늙어가면서 직업, 친구, 가족, 재물, 성욕, 미래, 희망 등

사라지는 현실을 발견하게 된다.

주어진 삶을 그대로 살면 인간은 살아 봐야 흔하게 칠 팔십이다.

물론 최근에는 수명이 길어져 구십세를 넘기고 사는 세상이긴 하지만.

나 어릴적만 하더라도 나이가 많아 사회에서 할 일이 없어지더라도

집안에서 만큼은 어른으로서 아들 손자 며느리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생을 마감하더라도 온가족 친지 모여 3일, 5일, 7일정성스레

초상을 치루어 주었는데

가끔 접하는 뉴스속에 주인공이 되어버린 노인들의 소외된 삶을 살다가

자살로 마무리 했다는 뉴스를 들을 때 마다 남의 일 갖지 않게 섬찢하다. 


모든 것이 깨어지고 무너져 버린 후 찾아오는 병(病)

孤獨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잃어버린 나(自我)를 찾아야

孤獨으로부터 해방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실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진정한 치료제는 歲月이 약(藥)이었다.

다시 금 찾아온 孤獨을 관리를 잘하고 포장을 잘해서 다락에 숨겨 놓았다가

필요 할때마다 꺼내서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을 청해 본다.

내일은 즐거운 孤獨을 꺼내서 또 다른 시간 여행을 떠나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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