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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 박용운 Mar 23. 2022

예순네 살이 되었을 때

(when I'm sixty four)



“예순네 살이 되었을 때”


 (when I'm sixty four)








  “내가 퓨즈를 갈면 당신은 스웨터를 짜고

   일요일 아침이면 드라이브를 하고

   정원을 가꾸며 잡초도 뽑고

   이제는 무엇을 바라겠어요.

   내가 예순네 살이 되었다 해도

   당신은 여전히 나를 원할 건가요.”


  1967년 발표된 이 곡은 폴 매카트니가 직접 노랫말까지 붙인 것인데, 이미 ‘팝’의 고전으로 알려진 곡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노년을 함께하고 싶은 소박한 꿈을 읊은 이 노래는, 알고 보니 곡명이 ‘내가 예순네 살이 되면’이었다.


  왜 하필이면 예순네 살일까?


  폴이 열다섯 살 때 써 놓았던 노랫말이라는데, 소년이 먼 훗날 자신이 머리가 벗어진 노인이 될 때가 쉽게 상상이 되었을까. 아마도 그의 할아버지가 그때 64세가 아니었나 싶다. 15세 소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많은 나이라면 자기 할아버지 나이가 아닐까. 할아버지보다 더 늙은 자신은 도저히 머리에 그려지지 않았으리라.


  너무나 소박한 생활을 꿈꾸었던 그는 예순네 살이 된 내가 이제는 무엇을 바라겠는가, 당신이 여전히 나를 원한다면, 하며 평범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유적幽寂한 노년의 생활을 소망했다. 그러나 그가 꿈꾸었던 예순네 살의 아침은 노래처럼 달콤하지 못했다. 그는 음악 동지이자 아내였던 린다 이스트먼과 사별한 이후 헤더 밀스와 재혼했지만 4년 만에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다. 예순네 살이 된 그의 생일날엔 옛정을 생각한 헤더 밀스가 보낸 꽃다발이 배달되지만, 어느 해보다 쓸쓸한 생일을 맞는다.


  비틀스의 멤버로 세인들로부터 영원한 사랑을 받는 존 레넌은 마흔 살에 죽어서 신화로 남게 되었지만 살아서 자신이 부른 소박한 노래만큼 행복하기를 바랐던 폴 매카트니에게 남은 건 헤더 밀스와의 이혼으로 불거진 재산상의 문제와 불명예와 쓸쓸한 노년뿐이다. 젊어 소박한 노년을 노래했던 그는 그 당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닥치리라고는 생각이나 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늙어가고 싶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갖는 평범한 소망이자 동시에 가장 간절한 소망이 아닐까. 소망은 꿈꾸는 자의 몫이지만 불확실한 미래는 결코 행복함만을 선물하지는 않는 법. 나의 미래는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 것인가 생각하면 솔직히 두렵다.


  나는 나의 예순네 살을 위해서 어떤 노래를 준비해야 할까. 아마도 나는 폴 매카트니처럼 소박하면서도 잔잔한 일상의 행복을 꿈꾸는 노래를 부를지도 모른다. 젊은 날에도 이루지 못했던 화려한 명성을 늙은 날 어찌 바랄 것이며 그것이 인생에 무슨 의미가 될지 또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년이 되기 전 누구나 한 번쯤 꿈꿔 왔던 전원주택에서 상추를 솎아내고 일주일에 한 번씩 드라이브하고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영화관과 박물관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평균적인 소망, 평균적인 삶일 것이다.


  지금 평균수명이 예전과는 판이하게 길어진 것에 비하면 예순네 살은 결코 노년이라고 할 수도 없는 나이다. 적어도 예순네 살에서 이삼십 년은 더 살게 된다고 가정한다면 말이다. 나이가 들어 피부밑에서 검은 기운이 올라와 몸을 마르게 하고 주름이 늘고 얼굴빛을 수척하게 만드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병에 걸려 주위 사람을 힘들게 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얼마 전 아흔 넘은 연세로 세상을 떠난 노 할머니가 떠오른다. 평생 큰 병 한번 없이 잘 지낸 분이지만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간혹 주위 사람을 몰라보고 예측하지 못하는 돌발적인 행동을 해서 주위의 가족들이 노심초사했다.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은 그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축복이 될 수 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자식도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그것이 과연 축복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노할머니의 상태는 중증이 아니라 노년의 징후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여서 다행이었지만 치매가 있는 부모로 인해 겪는 자녀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여북하면 부모를 버리고 이민을 떠나겠는가.


  현대인의 노년은 가부장 시대였던 옛날에 비해 수명은 길어졌어도 권위나 사회적인 지위나 경제력은 뒤떨어진다. 젊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늘어난 노년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연하게 꿈만 꾸어서는 절대 안 된다.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따른 방편을 마련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품위 있는 노년을 살아갈 수 있게 할 것이다.


  폴 매카트니는 올해 우리 나이로 80세다. 이젠 여든넷이 되어도 당신은 여전히 나를 원할 건가요. 이렇게 노래를 고쳐 불러야 할 것이다. 나이 들어도 여전히 일할 능력이 있고 정원을 가꾸고 텃밭에서 감자를 캐낼 정도로 건강하다면, 적어도 조금이라도 비굴함 없이 그 나이에 걸맞은 당당함과 고요함이 깃들인 품위를 갖출 수 있다면 늙는 것도 그리 서러울 필요가 없겠다. 단 당신이 나를 여전히 원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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