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uruvuru Mar 24. 2017

치밀하고 농밀한 하지만 따스한 여자의 이야기

영화 <미스 슬로운>

※ 브런치 <미스 슬로운> 선행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미스 슬로운>은 시작부터 아리송하다. 케이크와 쿠키 그리고 세금에 관해 빙 둘러 이야기하는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의 화법이 흡사 정치인에 가까워서다. 애시당초 정치 로비스트라는 개념에 관해 잘 모르는 우리는 정치인이나 이를 협상하는 로비스트가 거기서 거기일 것이란 의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하지만 <미스 슬로운>은 시간이 갈수록 그 개념과 의미가 아리송한 우리에게 이를 분명하게 구분시킨다. 정치인과 로비스트의 한 끗 차이. 그 간극에 이 영화가 내비치는 의미와 탁월함이 무심하게 끼어있다. 


총기 규제를 지지하는 쪽과 총기 소지는 국민의 당연한 권리라며 일축하는 두 파의 정치적인 싸움이 <미스 슬로운>의 주된 내용이다. 여느 정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단순 극명하게 나뉜 이분법적 싸움이 내용인 것이다. 이 안에는 당연하게도 좌파와 우익의 날개 돋는 싸움이 가득하고 어설픈 진영논리에서 빚어지는 어설픈 호소와 양측 간의 무시할 수 없는 그럴듯한 이유가 매섭게 포진해있다. 제로섬 게임이다. 

법정에 선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

이 영화를 만약 주인공 슬로운이 서있는 입장인 총기 규제 지지 측으로 치우쳐 생각한다면 영화를 온전히 즐기는 건 어려울 것이다. <미스 슬로운>이 말하고 싶은 건 총기를 규제해 총의 위협에서 벗어나자는 뜨거운 성토가 아니라 나름의 이유와 각자의 정의로 나뉜 총기 규제를 둘러싼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명해내자는 게 아니다. <미스 슬로운>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끝도 없이 꼬리를 물고 늘어진 극명한 정치적 사안에서 어떻게 하면 이길 것이고, 또 어떻게 하면 도덕적으로 이길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도덕?이라는 말의 어폐부터가 정치와는 제법 거리가 있는 말이다. 우리는 정치에서 도덕적 잣대가 그리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더군다나 도덕을 넘어서 정에 호소하게 이르면 그건 각 잡힌 반듯한 논리이기보다 인간으로서 호소하는 개인적인 주관에 불과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의사를 결정하는 것 또한 사람인지라 우리는 매 순간 정치적인 사안에 도덕성과 정에 쉽게 휩쓸린다. 


뛰어난 로비스트인 슬로운은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매 순간 수치적이고 정확하게 계산된 논리로 그 어떤 누구든 간에 반박할 수 있는 명석한 두뇌와 예리한 통찰력을 지녔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지극히 인간적이고 불분명한 잣대 또한 정치라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불꽃 튀기는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미스 슬로운> 중 한 장면

그렇기에 그녀의 선택과 행동은 소스라치게 놀랍기도 하고 때로는 비도덕적이라 생각되어질 정도로 실망스럽기도 하다.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다운 발상은 그녀를 거쳐가면 이상하게도 예리한 정치적 무기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똑똑하고 명석한 그녀를 신뢰하다가도 좀처럼 그녀의 속을 알 수 없는 순간이 영화의 곳곳에 가득하다. 그 순간마다 매섭기만 한 그녀에게 실망한다. 뛰어남과 훌륭함이 명확하게 구별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미스 슬로운>은 뛰어난 여성의 뛰어난 로비가 마냥 빛을 발하는 영화가 아니다. 뛰어난 개인의 이면에도 축 늘어진 한 사람의 나약한 여성이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슬로운은 결정한 걸 절대로 구부리지 않는 여성으로 그 완고함에는 늘 서늘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영화에서 끊임없이 보여주는 슬로운의 인간적인 면모나 그녀가 일부 명성을 이룩하기 위해 버린 것들에 대한 암시는 숙연하다. 그녀가 결코 더러운 정치판에서 찌들고 병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역설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녀는 포기한 삶의 일부를 욕구 해소를 통해 잠식시켜가며 현재의 삶에 집중하고 균형을 맞춘다. 


그 균형이 극적으로 발하는 지점은 영화의 최종 막에서다. 위태로운 상황에서 초조와 떨림을 감추지 못했던 그녀는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여기지 못했던 주변인들의 아우성을 짐작한다. 그리고 이를 발판 삼아 위기를 극적으로 모면한다. 위대한 개인이 위대하지 못한 개인에게서 힘을 얻는 지점은 이 영화에서 전혀 볼 수 없던 대목이다. 그 순간이 굉장히 아름답다. 개인의 성장은 이토록 한 순간인 것이다. <미스 슬로운>에서 발견할 수 있는 탁월함은 바로 이 지점이다. 모두가 완벽하지 않고 모두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이 돕고 교감할 수 있다는 사실. 이는 실리로만 점쳐지는 정치판에서 보기 힘든 무엇이다. 

<미스 슬로운> 중 한 장면

그걸 한 끗 차이라고 말하고 싶다. 슬로운이 보여준 행동들 역시 계산으로 넘실대는 이해타산적인 행동에 불과하지만 정치는 본래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챙길 너와 나의 이익 보따리가 어떻게 구성되든 간에 어디까지나 중요한 건 이득 관계가 아닌 이로 인해 변화할 우리의 앞길이다. 이 선택의 간극에 존재하는 사람과 사람의 정서적인 교감 유무는 중요하다. 교감이 없어도 무리 없이 잘 굴러갈 수 있다. 하지만 교감이 있다면 괜한 확신이 든다. 조금 더 사람을 위한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위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미스 슬로운>은 자칫 빠질 수 있는 정치와 사람의 간극에서 발견하는 귀중한 경험을 말한다. 미국 정치 현실과 내막을 고발하는 영화지만 미국에 한정된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이는 현재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유례없는 정치 스캔들로 발칵 뒤집힌 대한민국과 영화 속 뜯고 뜯기는 정치 현장은 놀랍게도 똑같다. 우리는 다소 쓰라린 기억들을 꺼낼지도 모르지만 이 경험은 귀중하다. 현재 우리를 되새기는 의미에서 <미스 슬로운>은 훌륭하다.

작가의 이전글 두 여자의 치명적인 방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