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갈증> / 나가시마 테츠야
독특한 연출 방식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나가시마 테츠야 감독은 거듭 과감해지는 중이다. 플래시 백을 거대한 닻처럼 쏘아 올려 주름잡는 그의 서사는 밑으로 갖은 해류가 흐른다. 이를테면 바다 위에 배가 둥둥 떠다니는게 아니라 배 아래로 물이 흐르는 식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게 좀처럼 무슨 이야기인지 싶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확실하게 보이는 건 퍼즐이 점점 모여간다는 사실이다. 구석진 조각부터 가운데에 찍을 방점까지 영화를 구성하는 수많은 수수께끼는 다 맞추고 나서야 감독의 의도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나가시마 테츠야 감독의 영화는 끝까지 지켜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영화에는 반전 아닌 반전이 의도와 함께 표표히 떠오르기 때문이다.
<고백>은 의도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떠오른 작품이었다. 처음부터 딸을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한 여정임을 암시했지만 관객은 어느새 그 사실을 서서히 잊어간다. 필시 그건 그의 과장된 연출법과 슬로우 모션을 적극 활용해 씬 자체에 실어낸 힘에 홀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야기의 큰 흐름을 느끼고 통찰하기 보다 지금 이 순간에만 적극 집중하게 된다. 결국 모든 진실은 곳곳에 포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는 연출이 반이다. 스토리는 생각외로 단순하다. 하지만 그 나름의 과감한 3류 연출과 B급 영화를 연상시키는 어지러운 면면에는 중력같은 힘이 있다. 어찌됐든 빨려가는 것이다. 점점. 점점. 점점점. 그리고 이내 폭발하게 된다. 그 순간, 그의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굉음을 울린다. 야쿠쇼 코지와 고마츠 나나 주연의 영화 <갈증> 역시 이런 그의 방식이 가장 고조된 작품임에 틀림없다. 마지막이 실로 대단하다.
<고백>과 비슷하게 <갈증> 또한 감독이 내던지는 의도는 확실하다. 목표는 여전히 하나다. 두루뭉실하지 않고 정확하게 겨냥한다. 실종된 딸을 찾겠다는 전직 형사의 끝없는 발악은 전작인 <고백>의 내 딸을 죽인 범인을 찾겠다는 모리구치 유코의 담대함과 비슷하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그의 방식과 그녀의 방식이 전혀 닮지 않은 점이다. <고백>의 그녀는 잽싸고 영악하며 영리함을 겸비한 지능적 캐릭터에 가깝다면, <갈증>의 아키카주(야쿠쇼 코지)는 멍청하고 상스럽고 제 분에 못 이기는 평면적인 캐릭터에 가깝다. 둘이 목적을 이루는 방식은 엄연히 다르다.
이야기 속에서 계속 되풀이되는 3년 전의 이야기는 딸을 찾고 딸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과거의 사실들이다. 그곳에서 발견되는 딸의 표면은 침착하고 공정하며 도덕적으로 옳바른 그의 착한 딸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녀의 실종에 관한 정황 그리고 사실들을 취합하면 정작 그 자신이 알고있던 딸이 도덕적으로 크게 어긋나고 뼛 속부터 심하게 뒤틀린 ‘나쁜 X’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과거의 어떤 장면을 회상한다.
딸 카나코(고마츠 나나)는 전에 그를 매서운 눈으로 쏘아본 적이 있다. 역겨운 걸 보는 듯한 매정한 눈이었다. 그 상스러운 눈에 그는 잠시 이성을 잃었다. 방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가 딸을 구타한다. 하지만 카나코는 되려 침착하고 여유롭다. 그의 폭력이 뭐 별거 아니라는 듯 되려 그를 도발한다. 아키카주는 그 날을 떠올린다. 그때 느낀 딸은 분명히 이상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딸이 아니었다.
<갈증>에서 자주 목격되는 연출은 지극히 황야를 달리는 서부극스러운 연출이다. BGM부터 웨스트 느낌에 갈색 정취를 불러 일으킨다. 또 장면마다 수놓는 80년대 미국 코믹스적인 연출과 무법지대를 연상시키는 허울 뿐인 경찰 그리고 총과 총을 겨누는 카우보이적인 대결 구도가 그렇다. 아키카주는 일본 땅에서 자라난 서부의 카우보이를 연기한다. 하지만 그는 정의를 짊어진 정통 서부 카우보이가 아닌 악에 심취한 동부에서 굴러온 찌끄레기 총잡이다.
하지만 그는 악에 가까운 인간이여도 나름의 정의와 분명한 책임을 등에 짊은 캐릭터다. 이는 처음에 딸의 행방을 추적하는 가운데서 벌어지는 죽음의 기로와 처절한 몸부림에서 볼 수 있듯이, 딸을 향한 감정이 마치 분노로만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딸의 진실에 관해 마주하고, 땀을 흡사 이과수 폭포처럼 쏟아내는 동안 그의 의도가 단순히 실종된 딸을 찾아서 한 방 먹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걸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입은 흰 수트의 상흔에서 여실하다. 피로 얼룩진 그의 옷에는 딸을 찾기 위해 버텨온 수만가지 노력이 담겨있다. 그가 괜히 하드보일드 풍에 사고가 꽉 막힌 일방통행 캐릭터여서가 아니다. 그의 분투에는 어떤 진정성어린 노력이 담겨있다.
그는 엄연히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가 곧잘 꿈 꾸는 이쁜 아내와 더 이쁜 딸과 한 집에 함께 사는 CF의 한 장면은 그가 진정으로 염원하는 꿈이다. 하지만 그가 꿈꾸는 그런 행복에 겨운 삶은 이제 없다. 다시 만들거나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엔 그는 너무 많은 실수를 했고 현실 역시 가볍게 뒤집을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는 어딜가서나 카나코의 욕을 듣는다. “당신 딸은 쓰레기야” 그는 단번에 수긍한다. “당연하지 누구 딸인데” 여러번 반복되는 이 대화에서 우리는 상스럽고 못난 아버지 아키카주가 아니라 한 아이의 책임감 어린 아버지 아키카주를 발견한다. 정신이 혼미해질 때마다 떠올리는 이상적인 가족관이 결코 그의 약에 취한 상상이라기 보다 그 역시 이런 과오를 남기고 싶지 않았음을 통찰하는 계기다. 한 때 아버지이기를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았던 그는 딸의 진실을 파헤치며 딸의 놀라운 사실들에 다가간다. 거기서 발견한 건 지독히도 똑같은 딸과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을 하나부터 열까지 똑닮은 딸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아버지니까. 내가 두드려 패서라고 어떻게든 제 정신을 차리게 만들고 싶은 거다. 그런 그의 간절한 바램에서 아버지라는 책임의식이 서서히 떠오른다. 이는 아주 막바지에 이르러서다. 엉망진창에 못되먹은 아버지도 결국은 아버지였다. 딸에게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못난이 아버지였다.
<갈증>에서 확인하는 아버지라는 개념은 날이 갈수록 무뎌지고 황망해지기를 반복하는 아버지가 아니다. 한 번 놓았던 책임감을 도로 주워담을 수 있는 건강한 아버지다. 하지만 그 건강함이 건강함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외적인 건강에 빗대는 말이 아님을 안다. 그가 이야기하는 건강함은 ‘집요함’, ‘끈질김’ 그리고 내면에서 가늘게 속삭이는 애정을 감지할 줄 아는 그런 건강함이다. 이는 제목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갈증,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때론 그렇다.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안정하고 덧없기도 하다. 하지만 제 아무리 멀어져도 끈끈한 무언가가 있다.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과도 같은 절실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