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쉘 위 댄스> / 수오 마사유키
타인의 은밀한 향기와 서늘한 눈길로 가득한 전철 안에선 쉽게 눈을 둘 곳이 없다. 사방이 모르는 사람이며, 쳐다볼 곳이 마땅치 않아서다. 무언가 소일거리를 찾아 몰두하거나, 잠시 그 날의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쪽잠을 청한다거나, 하염없이 멍 때리는 것만이 무안한 시선을 덜어내는 최소한의 행동이다. 전철의 매너리즘이랄까. 방해받지 않고 그렇다고 방해하지 않는 그런 암묵적인 약속. 무한히 반복되는 피곤한 일상 속에 체화되어버린 이러한 행동들은 어찌 보면 질서 정연한 지극히 현대 시민다운 모습을 자아낸다. 그러나 정작 그 안에는 사람들 저마다의 온기와 생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스기야마(야쿠쇼 코지) 역시 그런 매너리즘이 몸에 베어있는 남자다. 한 가족의 가장이자 평범한 샐러리맨인 그는 전철 속 일상이 자연스럽다. 출∙퇴근길만 몇 년째니까. 분주했던 하루를 끝마치고 전철에 오른 순간, 그는 숨만 쉬는 인형이 된다. 그 누구에게도 관심 갖을 새도 없이 잠시 눈을 붙이고 피로를 달랠 뿐이다. 내일 있을 고단한 하루를 생각하면 별 수 없는 일이다.
곤히 잠든 그는 전철의 덜컹거림에 순간 자세를 잃는다. 비몽사몽 한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린 순간, 그는 우연히 창문 너머로 한 여자를 보게 된다. 여자는 높은 빌딩 위에서 창문을 젖혀두고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그저 넋을 놓고 가만히 서있었다. 스기야마는 잠깐이지만 그 순간의 모습에 매혹되고 만다. 그는 그녀의 반반한 외모와 자태에서 풍기는 우아한 매력은 물론이고 그녀가 자아내는 고독한 아우라에 강렬하게 이끌린 것이다. 총기를 잃었던 그의 눈이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강렬한 이끌림에 정체모를 활력을 찾게 된 스기야마 퇴근 길마다 해당 정거장을 지나칠 무렵이면 두 눈을 크게 뜨고 여자가 있는 곳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여자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처음 봤던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 고독으로 차있는 눈망울과 허무 그 자체를 나타내는 듯한 자태로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여자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남성의 손을 맞잡더니 이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는 궁금해졌다. 그녀가 누구인지. 그녀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그녀가 있던 장소가 댄스 교실이란 사실을 감안했을 때, 그녀는 댄스 학원에서 일하는 강사 거나 수강생임에 틀림없다.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그가 무엇보다 궁금해했던 건 베일에 가려진 그녀만큼이나 그녀와 댄스라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연관성이었다.
얼마 후, 그는 여자가 있는 댄스 교실을 방문한다. 그로서는 대단한 일탈이다. 그곳은 처음 가본 그에게 있어 당혹스러운 장소였다. 사교댄스 교실이기 때문이다. 샐러리맨과 사교댄스라니. 단어만 놓고 봐도 야릇하고 불성스럽다. 그는 가족 딸린 한 집안의 가장이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싶다. 한심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 본 그녀가 눈 앞에 나타난 순간, 앞선 생각을 일절 잊고 무언가에 홀린 듯이 댄스 교실에 등록한다.
<쉘 위 댄스>의 초반부 전개를 통한 감상은 이 영화를 쉽게 예단하게 만든다. 이성에 매혹되어 불순한 동기를 갖고 찾아온 중년의 남자. 대략적인 구성만 봐도 이야기가 충분히 예상가는 바다. 더구나 가족에 충실하고 정직한 캐릭터로 묘사되는 스기야마의 일탈은 극적인 호기심을 자아내고 불안함과 초조함까지 자아낸다. 올곧게 살아온 캐릭터이기에 그의 예상치 못한 일탈이 극대화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영화는 전혀 그런 흐름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되려 영화는 이 같은 인과관계를 전복하고 순수하게 댄스만을 다룬다. 일종의 맥거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쉘 위 댄스>는 사교댄스에 관한 이야기다. 사교댄스가 생소한 관객들에게 이해의 담장을 낮추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 이해를 이끈다. 또 극적으로 연출되는 인물 간의 갈등과 번뇌를 영화의 테마인 댄스와 함께 녹여내어 잔잔한 감동으로 이끈다. 이를테면 스기야마의 불순한 목적을 댄스의 마력으로 치환해 그가 진지하게 춤을 연습한다거나, 그가 흠모했던 그녀 마이(쿠사카리 타미요) 선생이 잃어버렸던 댄스의 즐거움을 찾아내는 과정, 스기야마의 별난 회사 동료 아오키(다케나카 나오토)가 춤에 열광하게 된 이유 등 각각의 인물들의 드라마를 적재적소로 펼쳐낸다.
실제 몸으로 재현되어야 연출이 가능한 댄스를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모든 배우들이 기본기부터 실전까지 절묘하게 재현해 낸 모습은 이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이 같은 사항으로 미루어 볼 때, <쉘 위 댄스>는 어쩌면 스포츠 장르의 일부로 포섭시켜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스포츠가 추구하는 가치와 사교댄스가 추구하는 가치가 본질이 다르다는 걸 계속해서 설파한다. 대개 스포츠가 경쟁의식에서 발현되는 재미를 극적인 카타르시스로 설정하는 반면, 영화는 비교적 경쟁과 거리감을 두었다. 영화는 대회를 주최하여 등장인물들의 댄스 경쟁에 불을 지피 우는 듯했으나, 이기고 지는 것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사교댄스의 기본인 매너리즘의 단적인 예를 보여주고 마무리 짓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영화에서 스기야마가 실수하는 장면).
실수를 책망하고 가족들에게 숨겨왔던 댄스의 열정을 들킨 스기야마는 더 이상 춤을 추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는 댄스를 알기 이전의 그로 돌아온다. 출∙퇴근길 전철에서 보았던 무기력한 그로 돌아온다. 가족들은 그런 그가 안쓰럽다. 총기를 잃은 눈과 괜찮다며 웃음 짓는 억지 미소에서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춤을 추었고, 지루한 일상의 반복에서 새로운 목표를 통해 어떻게 생기를 되찾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이미 춤과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었던 것이다. 이미 그의 몸은 춤에 대한 열정으로 체화되고 말았다.
계속해서 춤을 다시 추는 것을 거부하는 그에게 동료들과 가족들은 필사적으로 설득한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좀처럼 무겁기만 하다. 열정을 못내 숨기고 다닌 그이기에 대놓고 드러낸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고 겸연쩍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다시 시작된 지루한 퇴근길에서 어떤 메시지를 목격한다. 모든 것이 시작된 그 장소다. 처음 여자를 바라봤던 그 역이다. 댄스 학원 창문 위로 스기야마를 향한 메시지가 쓰여 있었다. ‘쉘 위 댄스?’ 진심이 담긴 그 메시지를 본 그는 처음 설레었던 장소에서 다시 설레기 시작한다.
하루하루 설렐 수 있다는 건 축복과도 같은 일이다. 목표를 향해 죽도록 달려온 스기야마는 목표를 달성함과 동시에 삶의 욕구를 상실한다. 그는 매일같이 주어진 일상에 억지로 충실할 뿐, 그 이상을 생각하지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빠르게 귀가해서 조금 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음 날을 맞이하는 것, 그것만이 그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지혜였다. 그러나 그는 여느 때와 같은 퇴근길 전철 위에서 우연히 아주 우연히 삶을 송두리째 바꿔 낼 새로운 목표를 찾았다. 침묵 어린 고독한 공간인 전철 위에서 발견한 건 창문을 통해 비친 또 다른 세상이었다. 출발지와 목적지 중간을 이루는,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장소에서,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났다. 실제 하는 세상이었지만 너무 먼 세상이었다. 하지만 가까운 세상이기도 했다. 자꾸만 시선이 아래로 쏠리는 전철 위에서 우리는 늘 같은 세상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눈을 돌리면 또 다른 세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쉘 위 댄스>는 고개를 들 것을 요구한다. 그곳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치켜올린 시선에서 우리는 운명과 조우할지 모른다. 스기야마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