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아이> / 호소다 마모루
‘살다 보면 한 번쯤’이란 적적한 노래 가사처럼 살다 보면 인생의 갈림길이 눈에 아른한 순간이 한 번쯤은 찾아들기 마련이다. 예고 없이 도래하는 이런 선택 어린 순간은 누구나가 당황스럽다. 다만, 그런 순간을 받아들이는 감각만큼은 저마다 다르고 판이하다. 누군가는 이 같은 경험이 익숙한 나머지 별 것 아닌 듯 넘겨버릴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생소한 나머지 마치 천운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고 예민할 것이다. 접촉과 반응으로 이어지는 시냅스의 기민함과 이를 경험의 영역에서 풀이하는 행동양식의 차이는 확실히 축적된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 대조차를 둘째 치고, 무엇보다 확실하게 생각할 수 있는 건 우리 모두가 적어도 한 번쯤은 이런 순간에 직면한다는 사실이다.
호소다 마모루의 작품들은 늘 그런 삶의 갈림길에서 깊게 고민한 흔적을 보여왔다. 그의 작품들이 밝고 유쾌한 측면을 강조한 것과 애니메이션으로 국한된다는 점은 그의 고민 심지가 짧을 거란 편견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장르의 규격과 한계를 떠나, 그는 언제나 삶을 향한 진지한 고민으로 시작해서 어떤 선택에 이르기까지. 일상적인 난관을 범적인 영역으로 끌어오며, 또 그런 난관마다 필연적으로 발견하게 될 어떤 가치를 환기한다. ‘성장’이다.
호소다 마모루의 첫 롱 타임 연출작이라고 볼 수 있는 <디지몬 어드벤처 - 우리들의 워 게임>에서 그는 선택받은 8명의 아이들에게 평소 이상의 난관을 제시했다. 난관이라 해봤자 아이들이 언제나 각기 다른 두 세계(디지털 월드 리얼 월드)의 중개자로서 난관을 타파해온 건 사실이다. 다만, 크기가 달랐다. 그들의 힘을 아득하게 초월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TV 시리즈에선 판이하게 다른 선택으로 꾀도록 만들었다.
선택받은 아이들이 위기를 대하는 방식은 스스로의 힘을 믿는 것이었다. 혹은 <15소년 표류기>의 유사 설정처럼, 어른과 단절된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상대란 오로지 그들 자신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내부적으로 해결하려 드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디지몬 어드벤처 - 우리들의 워 게임>에서 보여준 호소다 마모루 식의 디지몬은 말 그대로 ‘우리’였다. 아이들은 처음으로 나와 친숙한 동료들만이 아니라 생판 모르는 아이들의 힘까지 빌려가며 위기를 타파해 나갔다. 디지몬 세계관의 근간이 되는 선택받은 아이들의 ‘선택’이란 무게가 처음으로 덜어지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은 비로소 운명의 업에서 벗어나 ‘성장’의 길에 접어들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는 또 어떤가. 우연히 운명을 바꿔 낼 어마어마한 능력(타임 리프)을 깨닫게 된 마코토는 영문 모를 힘에 놀라 환호했다. 마코토는 어지간한 철부지 소녀와 다름없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능력을 남용하면서 자신의 목적과 감정에 충실했다. 그러나 호소다 마모루가 구성한 마코토의 일상은 그녀가 좀 더 세상을 넓게 보는 지혜를 갖게 만들었고, 스스로의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커다란 일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만들었다. 마코토가 마지막으로 사용한 능력은 여실히 그녀의 성장을 상징하는 바였다.
차기작 <늑대 아이>역시 성장에 관한 드라마였다. 다만, 전작들과는 다르게 <늑대 아이> 앞에 놓인 문제는 조금 더 삶과 밀접한 냄새를 자아냈다. 늑대 인간이란 환상의 존재를 다루는 나머지, <디지몬> 시리즈나 <섬머 워즈>와 같이 설정에 기반해 이야기를 끌어 나갈 것 같았으나 <늑대 아이>는 설정보다는 관계를 중시했다. 그리고 관계보다 감정으로 호소해가면서 호소다 마모루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공감대가 큰 작품으로 기억됐다.
<늑대 아이>에서의 늑대 인간은 밤마다 본능을 억누르지 못해 늑대가 되어 사람들을 덮친다는 그런 흉악한 설정이 아니다. 제 아무리 늑대 인간이라고 하나, 영화 속의 그들은 보통의 인간과 유별나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과 늑대, 두 가지 모습을 형상화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의식에 따라 인간과 늑대의 모습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그들의 문제는 ‘차이’보다는 ‘선택’이었다. 늑대와 인간의 피를 반씩 나눠가진 이상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지 정해야 만 했다. 그들이 딛고 있는 사회가 아무래도 인간들에 의해 구축된 사회이기에 대개 전자인 인간으로 몰리는 쪽이었다. 하나의 남편인 ‘그’ 역시 인간의 삶을 택했다.
호소다 마모루가 구태여 늑대 인간을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소외된 계층? 숨어 지내야만 하는 이들? 사회적 약자들을 빗대어 은유하려는 그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이 하나 같이 ‘성장’에 관해 이야기해 온 걸 생각하면, 늑대 인간은 마치 국적이나 이념과 같이 뚜렷하게 양분되는 개념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확실히 양분되는 두 갈래길 위에서 어딘가에 편승해야 만, 즉 삶을 향해 필연적으로 찾아드는 순간을 묘사하기 위함 역시 의도 중 하나가 아닐는지 싶다.
남동생인 아메 그리고 누나인 유키는 점점 커가면서 늑대와 인간 사이에서 정체성을 심각히 고민한다. 소극적인 아메는 초원을 뛰노는 늑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반대로 적극적인 성격의 유키는 천성부터가 늑대다. 두 아이의 판이한 성격 차는 늑대와 인간 각각의 스탠스를 취해야 만 하는 남매의 비극적인 엇갈림을 시사한다. 그러나 호소다 마모루는 여기서도 ‘성장’에 주목한다. 육체와 정신 그리고 명백히 다른 두 성격과 삶을 맞부딪혀가며 체감하는 가치관의 차이를 관찰했다. 결과, 아메와 유키는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두 아이의 고뇌와 선택이 교차하는 지점이야 말로 진정한 성장을 느끼는 대목이 아닐까. 천성을 거스르고, 체화된 습관을 뒤로하고서 내린 뼈 아픈 결단이야 말로 그들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아메와 유키 둘의 상반된 가치와 판이한 길은 분명한 이별이다. 가슴 아픈 뒷모습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소를 머금을 수 있다. <늑대 아이>에서 엄마인 ‘하나’가 멀찌감치서 웃으며 보내 주듯. 호소다 마모루가 이야기하는 성장은 성장통이 분명하지만 그 뒤엔 분명 감출 수 없는 기쁨과 환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