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 작가 프로젝트

by 낸시코야

수업 중에 연속해서 전화가 울린다. 나와 통화하는 분들은 대개 휴대전화에 연락처와 소속을 남기거나, 용건을 설명하고 전화를 부탁하는 문자를 남긴다. 수업 중이면 거절하기 일쑤라 웬만해선 통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엔 평소처럼 무시했지만, 끊임없이 계속 울려대는 진동에 잠시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마장 도서관이에요. 이번 ‘나도 작가 되기’에 뽑히셨어요”

“아~ 네~ ” 심드렁한 목소리로 들렸는지 “안 기쁘세요?”하고 묻는다.

합격을 축하하는 들떠있는 목소리에 비교해 나의 반응이 실례인가 싶은 생각에

“아니, 좋죠. 뽑혔다는데….”하고 서둘러 답한다.

실은 참여 자체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게 목소리로 전해졌나 깜짝 놀랐다. 사서 공부를 결심하고 등록한 참이었다. 금요일마다 참가해야 하는 도서관의 이 과정을 토요일 수업과 같이 진행하는 것이 가능할까 싶은 마음이었다.

선발 사실을 전하며 바로 참가 여부를 확실히 해달라고 물어온다.

“프로그램에 성실하게 참여하실 수 있는지 확인하고 있어요. 워낙 지원자가 많아서 경쟁률이 높았거든요. 떨어진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1회라도 빠지면 제명하기로 했어요. 대기자들도 기회가 주어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어서요, 금요일, 가능하신 거죠?”

할 수 있을까 하는 주저함 속에서 전화기 넘어 들리는 ‘지원자가 많아서’ ‘경쟁률이 높아서’ 단어가 귀에 팍 꽂힌다. 튀어 오르는 그 단어들이 망설이던 나를 붙잡는다.

“그럼요, 금요일은 비어 있습니다” 나는 올해 대단한 프로젝트 두 개를 돌려야 하는 셈이 됐다. 내 인생의 커다란 프로젝트가 동시에 시작되는 중요한 순간으로 기억될 날이다.


에세이를 쓰기 시작하자 어려움은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분명 내 마음 상태를 그대로 쓰고 있는데 글로는 내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글을 좀 써보겠다고 해서 갑자기 글감이 떠오를 리 만무하고. 무엇보다 매주 일정량을 써내는 것부터가 힘들었다. 시간이 있으면 좀 더 나은 소재를 찾아 미루게 되고, 제출일이 얼마 안 남으면 초조함이 글쓰기를 방해했다.

매주 에세이와 글쓰기 관련 도서를 나와 딸아이 대출카드까지 허락하는 한 최대로 빌려와 틈틈이 읽었다. 목차 구성부터 제목, 주제, 글의 배치나 구성까지. 이전의 읽기를 위한 시선들과는 달라졌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구석구석 뒤지며 나를 위한 속성 기술이라도 찾았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할 것처럼 말이다.

길 위의 철학자의 저자 에릭 호퍼는 제대로 된 형용사를 찾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의 무모함, 빠져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부어댈 때 잠깐의 흘러넘침, 그것이 사유의 결과물로 손에 쥐어진다. 이 아름다운 낭비에 헌신할 때 우리는 읽고 쓰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며 말이다.

글쓰기를 알려주는 수십 권을 읽다가 몇몇 나를 위한 글도 부분적으로 발견했지만, 간절함 만으로는 매주 요구되는 원고 30매 제출 분량을 채울 수는 없었다.


‘내가 나를 전혀 모르겠다’

놀랍기만 한 사실인데 나를 가장 모를 사람이 ‘나’라는 거였다. 내가 하는 생각과 의식을 ‘나’라고 여기고 ‘나’의 주인으로 여태 살았다. 나의 의지로 나를 통제하고 확대할 수 있다고 여기며 살았는데 나를 적을 수가 없었다. 글을 쓰며 타인으로 느껴지는 나를 의식하고 들여다보며 나 자신과 소통을 시작했다. 그동안 나에게 너무 무관심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로 산지 마흔이 넘은 이제야 나에 대해 알게 됐으니 아이러니하다. 한 주마다 진행되는 합평에 동료들의 에세이를 읽으며 나처럼 저마다 고유한 사정과 한계, 불가피함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글을 평가받는 이 자리는 비키니를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부끄러워 견디기 어려웠다. 이것까지는 보이기 싫은 치부가 있을 것인데 나를 보여야 하는 글이어야 했다. 찌질한 인성, 유치한 질투, 끝도 없는 불안, 바닥난 자존감…. 숨기고픈 사건과 감정들을 내놓아야 했다. 부끄러움과 평가의 부담을 뚫고 견디는 것이 매주 일과가 됐다. 나는 무관심한 것과는 다른 의미로 타인에게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쓰기를 하면서 부족한 글솜씨를 메꾸려 독서 외에 작가들의 강연에 열심히 참석했다. 독자가 아닌 작가 입장의 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다. 예전보다 더 작가들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작가들은 웃겠지만 나를 내놓는 고통을 경험 중인 동병상련의 마음이랄까.

얼마 전 참석한 은유 작가의 강연에서 “한 번의 강좌, 몇 번의 시도로 글쓰기에 좌절하고 물러나지 않았으면 한다”라는 그의 말에 용기를 얻는다.

‘쓰고 싶으면 빨리 쓰세요. 작가는 쓰는 사람이지 쓰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나에게 말하는 것처럼 등을 떠민다.

쌓아놓은 도서관 책들의 반납예정일이 다가올수록 분명 해지는 게 있었다. 나를 찾는 글을 쓰면서도 온전히 보여주고 싶은 나를 의식하고 있었다. 부풀려진 결과를 기대하고 이것, 저것 다 담으려 했던 마음이 나를 더 힘겹게 했다는 속내를 인정하고 그 두려움을 벗어내야 했다. 순수하지 않은 읽기였지만 다독(多讀)은 나를 내보이는 글쓰기에 거품을 떠내야 한다는 것을 알아챌 시간을 주었다.

‘책은 가난한 자의 친구’란 말을 좋아한다. 나의 노년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도서관에 들고 갈 가방과 옷차림에 신경 쓸 게 아니고 시력 관리를 해야겠다. 오래도록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말이다.

자꾸만 잊어버리던 루테인 한 알을 먹는다.

쓰기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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