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가 끝나고 자취방에 와보니 싱크대 위에 바나나가 있었다. 그 옆엔 쪽지가 있었다.
「맨날 아침 안 먹고 다니니까 그거라도 먹고 학교 가라.」
학교 간 사이에 엄마가 오셨었나 보다.
다음날, 학교 가기 전에 바나나 하나를 집었다. 껍질을 한 꺼풀 벗겼더니 조그만 나무늘보가 바나나에 매달려 있었다.
엇, 뭐지. 나무늘보는 바나나를 야금야금 갉아먹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날 올려봤다.
"너 뭐니?"
나무늘보는 동그란 눈으로 날 올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난 바나나를 식탁 위에 그대로 두고 학교에 갔다. 강의 시간 내내 나무늘보가 신경 쓰여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오후 강의는 모두 재끼고 집으로 달려왔다.
식탁 위에는 아까 그 나무늘보가 바나나 껍질을 이불 삼아 덮고 자고 있었다. 바나나는 반쯤 남아 있었다.
나무늘보를 흔들어 깨울까 하다가 관두었다. 대신 바나나 껍질을 살며시 치우고 두툼한 겨울 양말을 덮어 주었다. 나무늘보는 잠결에 꾸물꾸물 움직여 양말 속으로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양말을 들어 침대 머리맡에 두고 나도 눈을 감았다. 달달한 바나나 향이 머리맡을 맴돌았다.
늦은 오후에 눈이 떠졌다. 어느새 조그만 자취방에 붉은 노을이 가득 들어차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양말이 정갈하게 접혀있었다. 나무늘보는 보이지 않았다. 다 먹은 바나나 껍질이 싱크대 위에 고이 놓여있었다.
그 후로 나무늘보를 다시 볼 수 없었다. 대신 그날 이후 아침마다 바나나를 먹는 게 습관이 되었다. 매일 아침 바나나 껍질을 벗길 때마다 나무늘보가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