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쉬이 허리를 굽히는 억새들을 봤습니다. 그네들 사이로 조용히 잠기는 해도 보았고요. 억새는 바람도 해도 그냥 제 몸 사이로 보낼 줄 알고 전 그게 부러웠습니다.
바람에 몸을 편히 뉘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햇빛에 몸을 씻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오랜 상처가 불현듯 바람이 되어 불어오고 눈부신 햇살이 되어 쏟아지는 날에는 그냥 고개를 숙이고 싶습니다. 너무 차가운 바람과 너무 따가운 햇살을 어리석게 노려보다 눈이 시려 눈물이 흐르는 날엔 특히 그렇습니다.
아픔과 상처를 이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길 수도 없습니다. 그냥 언제까지나 패자로 남고 싶습니다. 그들에게 허리를 숙이고 몸을 낮추고 그냥 제 몸을 통과해 지나가게 하고 싶을 뿐입니다. 어떤 아픔은, 상처는 이길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를 잃은 아버지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모든 음절 모든 노랫말 모든 마디마다 울음이 고여 있었습니다. 정작 그 아버지는 덤덤하게 노래를 불렀지만 전 속에서 눈물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움켜쥐어야 했습니다.
그에게 힘내라는 말을 아직도 못 했습니다. 앞으로도 못 할 것 같습니다. 그저 바람이 햇살이 그냥 몸을 스치고 지나가길 바랄 뿐입니다.
바람을 쥐지 않고 햇살을 머금지 않고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방법이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너무 차가운 바람도 너무 뜨거운 햇살도 그냥 그렇게 지나가길 조용히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바람이 들어오고 해가 지면 다른 해가 뜹니다. 억새는 언제 허리를 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바람 아래 햇살 아래 통곡을 하며 몸을 부르르 떨 줄만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