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소설] 조그만 글씨

by 홍윤표

등굣길 건널목 앞에서 돌멩이를 주웠다. 원래 돌멩이를 줍는 습관이 있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그날은 그랬다. 돌멩이를 들고 보니 바닥에 조그만 글씨가 쓰여있었다. '심심해'. 돌멩이 바닥에 '심심해'라고 적혀 있었다. 싱겁네. 돌멩이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고 마침 바뀐 신호등에 맞춰 건널목을 건너 학교로 갔다.

2교시 한국사 시간에 공책에 필기하다가 뒷자리의 서영이가 자로 등에 글씨를 쓰며 맞춰보라고 장난치는 바람에 필기를 잘못했다. 필통에서 지우개를 꺼내는데 뒷면에 조그만 글씨가 적혀 있는 걸 봤다. '살살해'. 뭘 살살하라는 건지. 지우개로 공책을 벅벅 문지르다가 뭘 살살하라는 건지 깨달았다. 벅벅 문지르던 지우개를 살살 문지르고 필통에 도로 넣었다.

그 뒤로 종종 물건 뒤 혹은 바닥에 적힌 조그만 글씨들을 발견했다. 매일 입는 학교 체육복 바지 뒷주머니에는 '좀빨자'라는 글씨가 있었고, 형민이와 게임을 하려고 쥔 스마트폰 뒤에는 '그만해'라는 글씨가 있었다.

글씨는 다른 사람들의 물건에서도 볼 수 있었다. 형민이의 수학 문제집 뒷면에는 '좀풀자', 아버지가 자주 애용하시는 소주잔 바닥에는 '작작좀', 누나가 운동하려고 장만한 실내 자전거 페달에는 '언제타', 엄마가 갱신한다며 십 년 만에 꺼낸 면허증 뒷면에는 '그냥둬'라는 글씨가 있는 식이었다. 하지만 다들 글씨가 보이지 않는 건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늘도 등교 후 바닥에 '발씻어'라고 적힌 실내화로 갈아 신고 '무거워'라고 적힌 의자에 앉아 '지렁이'라고 적힌 공책에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뒷자리 서영이가 자로 내 등에 글씨를 쓰며 맞춰보라고 장난치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다. 내 발치에 떨어진 자를 주워서 서영이에게 건네다가 자 뒷면에 적힌 조그만 글씨를 보았다. '좋아해'.

자를 건네받은 서영이가 날 보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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