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 씨는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이에요. 모태 솔로라서 사랑을 안 믿는 건지, 사랑을 안 믿어서 모태 솔로인 건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요. 어쨌든 현수 씨는 사랑의 존재를 믿지 않는 팍팍한 사람이었죠.
그런 현수 씨는 요즘 고민이 있어요. 바로 심각한 탈모지요. 이제 막 이십 대 중반을 넘겼는데 현수 씨의 이마는 아메리카 대륙만큼 넓어졌어요.
현수 씨의 탈모는 너무 갑작스러웠어요. 하루아침에 이뤄졌으니까요. 여느 때처럼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 거울 앞에 선 현수 씨는 갑자기 넓어진 이마를 보게 된 거죠. 네, 말 그대로 하루아침이에요.
현수 씨는 대학 졸업을 한 학기만 남기고 있었어요. 한창 취업 활동을 해야 할 시기란 말이죠. 그런데 탈모가 생겼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현수 씨는 궁금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갑작스러운 탈모의 원인이 짐작 가지 않았어요. 아버지나 할아버지, 심지어 증조할아버지를 봐도 대머리는 아니셨거든요. 오히려 무성한 머리숱이 오래된 흑백사진으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어요. 병원에서도 이유를 알지 못했죠.
현수 씨의 탈모는 대체 왜 생긴 걸까요? 이제부터 그 얘기를 할 생각이에요.
그러려면 잠시 현수 씨의 이야기는 접어두고 시간을 거슬러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해요. 아, 걱정 마세요. 결국은 현수 씨의 탈모 이야기로 돌아올 테니까요.
무슨 얘길 할 거냐면요. 바로 표류자들 이야기예요. 네. 맞아요. 시간 표류자들.
새해 첫날 꼭두새벽, 그러니까 현수 씨의 머리가 아직 우랄산맥의 수풀림만큼이나 울창하던 때, 서울 시청 앞에 갑자기 출몰한 이 시간 표류자들은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미국의 이란 공습, 야당의 장외 농성, 전 장관의 비리 스캔들 같은 뉴스들을 단번에 신문 구석 말미로 밀어버렸죠.
총 176명의 시간 표류자들은 모두 현재로부터 104년 뒤인 2124년에서 온 사람들이에요. 나이, 성별, 직업 등은 다양했고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모두 특정 여행사에서 기획한 시간 여행 패키지를 이용했다는 거예요. 네. 그들은 시간 여행 중이었던 거죠. 시간 여행의 메커니즘에 대해 자세한 건 묻지 마세요. 시간 여행에 관한 모든 사항은 철저한 대외비고요. 뭣보다, 저도 잘 모르거든요.
그들은 모두 A 여행사의 시간 여행 패키지 상품을 구매하고 시간 여행을 떠났지요.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A 여행사 여행 장치의 시간설정판이 말썽을 일으켰고, 여행자들 모두 2020년 통일 전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10, 서울시청 앞으로 불시착하게 된 거예요.
졸업여행으로 1969년 전설의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가하려 했던 대학생 팀, 500일 기념으로 벨에포크 시절의 파리 살롱을 만끽하려 했던 연인 팀, 아버지 백순 기념으로 일본의 버블경제 호황기인 1989년에 온천여행 가려했던 가족 팀 등. 다양한 목적을 갖고 그에 맞는 다양한 목적지로 가려던 사람들이었죠.
정부는 고심했어요. 미래에서 온 사람들이 현재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점 보단 나쁜 점이 더 많을 것 같았어요. 시간의 흐름을 역행한 부작용이 생길까 봐 노심초사했죠.
하지만 우려했던 것보다 여파는 크지 않았어요. 표류자들은 점잖았고 지적이며 매우 협조적이었죠. 어찌 됐든 현재보다 발달된 문명의 지성인들이니까요. 어쩌면 그들 눈에는 2020년의 사람들이 미개하고 미숙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정부는 표류자들의 신사적인 협조 하에 그들의 활동 반경을 제한했어요. 최대한 현재의 사람들과 사건에 개입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죠. 그렇지만 그들을 수용소나 연구소 같은 곳에 가둘 순 없는 노릇이었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몇 가지 제안을 하면서 임대 아파트를 임시 거처로 마련해 주었어요.
그 제안이란 이런 것들이에요. 예를 들어, 중구 내에서만 생활해야 한다거나, 외출 시엔 반드시 정부가 지정한 표류자 거주 관리사 한 명과 동행해야 한다거나, 외출 중에 표류자 관리와 관계된 자 외에 누구에게도 자신이 표류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말 것 같은 것들이요.
그 외에도 자잘한 세부사항이 몇 개 더 있지만, 어쨌든 정부가 표류자들에게 권고한 사항은 크게 저렇게 세 가지였죠. 그리고, 점잖고 지적이며 매우 협조적인 표류자들은 흔쾌히 받아들였고요.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표류자 거주 관리사란, 정부가 표류자들을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해 임시로 만든 직책이에요. 말이 보호고 관리지, 사실은 감시에 더 가까웠죠. 어쨌든 정부는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다고 어깨를 으쓱했고요.
아, 참고로 현수 씨도 지도 교수님의 추천으로 표류자 거주 관리사가 됐어요. 비록 한시 임기제지만, 이력서에 공공기관 근무 이력을 한 줄 추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죠.
그렇게 두 달여가 지났을 때, 미래에서 사람들이 왔어요. 2124년에서요. 바로 표류자들을 데리러 온 거였죠.
그들은 표류자들이 어느 시대에 불시착했는지 알아내는 데에 시간이 조금 소요됐다고 말했어요. 자신들의 친구들을 잘 돌봐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죠. 그렇게 표류자들은 무사히 2124년으로 돌아갔어요.
자, 이렇게 표류자들 문제는 해결이 됐답니다. 정부는 앓던 이를 뺀 것처럼 속이 후련했어요. 조금 요란스러운 해프닝으로 끝나서 참 다행이죠. 하지만 이 해프닝이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은 사람이 있답니다. 네, 맞아요. 현수 씨를 잊으면 안 되겠죠.
그럼 이제 현수 씨의 탈모 얘기로 돌아가 볼까요? 아, 그러려면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기술적인 얘기라 그다지 자신은 없지만 일단 해볼게요.
그 왜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고 있다면서요? 화학반응이 일어나기 전과 후의 물질은 구성하는 성분만 다를 뿐 물질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래요. 또는, 닫힌 계의 질량은 상태 변화에 관계없이 변하지 않고 같은 값을 유지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네요. 죄송해요. 자신 없다고 했잖아요.
암튼 시간 여행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자주 빼들었던 무기 중 하나가 바로 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래요. 왜냐면, 우주 전체를 닫힌 계라고 치면 그 안에 있는 질량은 반드시 일정해야 한다는 거죠.
근데 미래에서 누군가 시간 여행을 통해 현재로 온다면, 현재라는 우리 우주의 질량에 미래라는 다른 우주의 질량이 추가되므로 질량 보존의 법칙에 위배되는 거죠. 그렇죠? 제가 지금 맞게 설명하고 있는 거죠? 이런 이유로 시간 여행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게 정설이었대요.
그런데 그걸 미래의 학자들이 해결했다네요. 시간 여행으로 인해 다른 시간차원에 추가되는 질량만큼 똑같은 질량을 가져온다는 거예요 글쎄. 등가교환이란 거죠.
예를 들어, 2124년에서 2020년으로 A 씨가 왔다고 쳐요. 그럼 A 씨가 2020년에 도착한 순간, 2020년에서 A 씨만큼의 질량이 2124년으로 전송돼서 보관된다는 거죠. 그건 꼭 사람이 아니어도 돼요. 공기여도 되고, 물이어도 되고, 돌이어도 되죠. 앞서 말했다시피, 구성하는 성분이 달라져도 물질의 질량이 같은 값을 가지면 법칙은 성립된다니까요. 그런 이유로 시간 여행 전에 반드시 여행자의 질량을 측정한대요. 그래야 그 데이터와 똑같은 값의 질량을 가져올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시간여행을 마치고 A 씨가 2124년으로 돌아가면, 2124년으로 전송돼 보관됐던 물질도 2020년으로 되돌아간다는 거죠. 정확히 동시예요. 질량의 차가 생기기 전에 순식간에 말이죠.
아무튼 저 같은 초심자는 이렇게 말로 풀어써도 모르겠는 걸 미래의 학자들은 장치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정말 대단해요.
자, 이제 지겨운 이론 설명은 그만두고 이야기로 넘어갈게요. 그러니까 표류자들이 2020년 통일 전 대한민국 서울 시청 앞에 불시착한 순간, 그들의 질량만큼의 물질들이 2124년으로 전송됐겠죠? 여기까진 문제없어요. 여행 장치의 시간설정판이 고장 난 거지, 질량균형계가 고장 난 건 아니니깐요. 근데 문제는 그다음이에요.
표류자들이 당초 여행 계획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체류하게 된 거죠. 원래대로라면 5시간 남짓 둘러보다 돌아갈 예정이었던 게 말이죠. 참고로, 기술 문제 상 다른 시간 차원의 체류 시간은 5시간이 최대라네요. 그런데 불시착하게 되어 본의 아니게 두 달이나 머물게 된 거예요.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그렇게 오래 지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우리 우주에 남기는 것들이 생긴 거예요.
그게 뭐냐면요. 아뇨, 대소변은 아니에요. 그건 어차피 우리 우주의 물질을 섭취하고 생긴 거니까 문제없죠. 그런 지저분한 얘길 하자는 게 아니고요.
문제는 바로 머리카락이었어요.
표류자들이 지내는 동안 자연스럽게 빠진 머리카락들이 그대로 2020년에 남게 된 거예요. 그들이 거주하던 임대 아파트나 돌아다녔던 곳, 길거리 여기저기에 말이죠. 자, 이쯤에서 분명 현수 씨의 갑작스러운 탈모 이유를 눈치채신 분들이 있겠죠. 그래도 노파심에 마저 설명할게요. 참고 들어봐 주세요.
표류자들이 2124년으로 돌아가면서, 두 달 전 2124년으로 전송돼 보관됐던 물질이 그대로 다시 2020년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표류자들이 남기고 간 머리카락 때문에 우리 우주의 질량값이 맞지 않게 될 지경이었죠. 머리카락은 아무도 신경 쓰지 못한 거예요. 미래에서 온 사람들도요.
그래서 하는 수없이 표류자들이 남기고 간 머리카락만큼 현수 씨의 머리카락을 2124년으로 급하게 전송한 거예요. 현수 씨의 탈모 덕분에 우주의 균형과 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거죠.
근데 왜 하필 현수 씨냐고요? 글쎄요. 신의 선택에 이유가 있던 적이 있나요? 저도 마음이 좀 급했던 거 같아요. 우주 질서가 무너지기 전에 그걸 막아야 할 책임이 있으니까요. 그 순간 보였던 게 현수 씨였고, 현수 씨의, 우랄산맥의 수풀림만큼이나 울창하던 머리숱이었거든요.
여기까지가 현수 씨의 탈모가 생긴 이유랍니다. 현수 씨한테 미안한 건 사실이에요.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현수 씨에게 머리카락 대신에 다른 게 남겨졌거든요. 네. 아직 이야기가 조금 더 남았어요. 에필로그라고나 할까요?
여러분, 혹시 질량 보존의 법칙과 함께 다뤄지는 법칙이 뭔지 아세요? 네, 맞아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란 게 또 있다네요. 아, 죄송해요. 또 지루한 이론 이야기예요. 그래도 조금만 더 참고 들어주세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요. 에너지가 다른 에너지로 전환될 때, 전환 전후의 에너지 총합은 항상 일정하게 보존된다는 건데요. 여기서 말하는 에너지는 운동에너지, 열에너지, 빛에너지, 소리에너지, 화학에너지, 전기에너지 등이에요. 당연히 사람도 에너지를 갖고 있죠. 대표적으론 운동에너지가 있겠지만, 그 외에도 많죠.
감정도 에너지 중 하나예요. 기쁘면 펄쩍 뛰고(운동), 화나면 얼굴이 붉어지고(열), 신나면 환호성을 지르고(소리). 긴장하면 땀이 나죠(화학). 감정이라는 에너지가 다른 에너지로 전환되는 거랍니다.
자, 표류자들이 남긴 건 머리카락만이 아니었어요. 이런 감정에너지도 남기고 갔죠. 바로 사랑이에요.
네. 표류자들은 사랑의 감정을 2020년 우주에 남기고 간 거예요. 정확힌 표류자들이 아니라 표류자 중 한 명이 남기고 갔죠. 그게 누구냐면요. 바로 현수 씨가 표류자 거주 관리사로 일할 때 담당했던 아가씨였어요. 이름은 예슬빛나.
예슬빛나 씨는 2002년의 월드컵 열기를 느끼고 싶어 혼자 여행을 가던 중이었죠. 그러다 다른 사람들처럼 2020년에 불시착했고, 정부의 통제를 받으며 임대 아파트에서 생활했고, 그리고 거주 관리사인 현수 씨를 만난 거예요.
예슬빛나 씨는 현수 씨를 짝사랑했어요. 왜냐고 묻지 마세요. 사랑의 메커니즘도 시간 여행만큼이나 어렵더라고요. 그리고 이별이 금방 찾아왔어요. 예슬빛나 씨의 사랑은 표출되지 못한 채 끝나 버렸죠. 그렇게 예슬빛나 씨는 2124년으로 떠나면서 사랑의 감정을 남기고 갔어요.
어떡해요. 또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안 맞게 생겼잖아요. 고립된 물리계의 에너지 총량은 항상 보존돼야 하는 건데 말이에요. 그래서 전 예슬빛나 씨가 남긴 감정의 에너지값만큼의 현수 씨의 감정을 얼른 2124년으로 전송했죠. 바로 사랑을 믿지 않는 감정이에요.
그러니까 현수 씨는 사랑을 믿지 않는 감정 대신, 예슬빛나 씨가 남긴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됐죠. 이마가 아메리카 대륙만큼 넓어진 현수 씨는 더 이상 예전의 팍팍한 현수 씨가 아니랍니다. 사랑을 믿게 된 거예요.
이게 제가 오늘 여러분을 붙들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예요. 거창하고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단순한 이야기죠? 음, 그러니깐 제가 현수 씨 머리카락을 2124년으로 전송해 버린 것에 대한 일종의 변명 비슷한 거예요.
어떨까요? 머리숱은 없어졌지만 사랑을 믿게 된 현수 씨. 전 손해 본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