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남부여행] 잠들지 않는 도시

by 홍윤표

천연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우리가 수영하는 동안 아내가 짐정리를 마쳐놨다. 숙소의 베란다에서 저녁노을을 감상하고, 해가 진 뒤에 저녁도 먹고 동네 구경도 할 겸 숙소를 나왔다. 우리가 묵는 숙소에서 구도시 중심가까지는 도보로 약 10분 정도 걸렸다.

숙소에서 바라본 붉은 저녁노을이 예뻤다.

낮과는 달리 저녁에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폴리냐노 아 마레에 온 관광객들이 모두 도시의 밤을 즐기기 위해 나온 것 같았다. 낮과는 달리 왁자지껄한 거리의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폴리냐노 아 마레 하면 떠오르는 대표 이미지인 라마 모나킬레 해변(Lama Monachile)을 볼 수 있는 뷰포인트가 두 군데 있는데, 그중 한 군데는 부르봉 다리(Ponte Borbonico su Lama Monachile)라는 오래된 다리 위다. 아마도 풀리아 지방 전체를 통틀어 사진이 가장 많이 찍히는 장소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묵는 숙소에서 구도심 중심가로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다리인데 아름다운 해변을 바라볼 수 있는 명소이기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리 난간을 등지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도 그 속에 섞여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는데 그냥 찍어도 예술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날이 어두워 해변에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절벽 사이에 묻힌 해변의 풍광은 밤에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부르봉 다리 위에서 찍은 라마 모나킬레 해변. 밤이지만 멋진 조명과 어스름한 밤하늘의 조합이 멋진 풍경을 자아냈다.

다리를 지나 구도심지로 들어가기 위해 '영주의 문'이라는 뜻의 아르코 마르케살레(Arco Marchesale)라는 오래된 관문을 지나쳐야 했다.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문양과 우아한 아치형 천정이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이 관문은, 마치 이제부터 본격적인 폴리냐노 아 마레의 모습을 볼 준비가 됐냐며 묻는 듯 당당히 서있었다. 관문은 관광객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경험을 제공하는데, 관문을 통과하면 눈앞에 아름다운 동화 마을이 펼쳐지면서 마치 현실 세계와 비현실의 세계를 구분 짓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관문을 지나면 아기자기한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한 좁은 골목을 지나 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광장에는 다양한 식당들과 노천카페가 동그랗게 모여 있고 한쪽에는 오래된 성당이 광장의 화려함 속에 고고히 서있다. 그 광장을 중심으로 아담한 골목길이 이리저리 뻗어 있는데 골목길마다 작은 식당과 카페, 기념품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본격적인 폴리냐노 아 마레로의 여행을 시작하는 관문인 영주의 문

우리가 관문을 통과해 구도심지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힘찬 음악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이 그 음악을 따라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저 멀리서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일군의 사람들이 저마다 악기를 들고 멋지게 연주하며 거리를 행진하고 있었다. 우리도 신이 나서 사람들 무리에 섞여 음악을 따라갔다. 행진은 광장에서 잠깐 멈춰 연주를 하고 곧이어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또 다른 광장에서 멈춰 섰다. 결국 무슨 행사였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우리의 폴리냐노 아 마레에서의 첫날밤을 기념하는 거라 생각했다.

폴리냐노 아 마레의 구도심지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거리 음악사들. 그들을 따라 다니며 밤거리를 만끽했다.

우린 악대가 멈춰 선 그 광장 옆에 자리한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저녁을 먹기로 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꽉 차지하고 있었는데 운 좋게도 자리가 하나 나서 기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언제나처럼 유라는 소울푸드인 오레끼에떼를 주문했고 아내와 나는 옆자리에서 다양한 핑거푸드가 2단 트레이에 올려진 메뉴를 먹고 있는 걸 보고 같은 걸 주문했다. 난 이탈리아에 와서 처음으로 밖에서 술을 먹게 돼서 신이 나서 제일 좋아하는 모히또를 주문했고 아내는 언제나처럼 아페롤 스프리츠를 주문했다.

애피타이저로 올리브 절임이 나왔다. 이탈리아에 오면 꼭 먹어야 하는 것 중에 올리브 절임도 있었는데 난 애초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많이 먹진 못했다. 그래도 갖다 준 성의가 있어서 열심히 집어 먹었는데 엄청 짭조름했다. 그래도 모히또는 맛있었고 무엇보다 유럽 소도시의 밤거리 분위기가 최상의 안주였다.

멋진 풍광과 시원한 밤바람, 예쁜 조명과 그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웃으며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마치 현실아 아닌 누군가의 아름다운 추억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폴리냐노 아 마레에서의 첫 끼니. 식당이 아닌 카페이기에 본격적인 식사 보다는 가벼운 안주 위주로 주문했다.

멋진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깐 밤거리를 산책했다. 어느 골목으로 가나 사람들이 많았고 왁자지껄했다. 이 도시는 영원히 잠들지 않을 것 같았다. 구도심지에서 살짝 벗어나자 꽤 넓은 골목길이 나왔는데 길게 이어진 길에는 각종 식당들과 야외 테이블이 빼곡했고 사람들도 엄청 많았다. 우리도 조만간 저기서 저녁을 먹자고 다짐하고선 졸린 유라를 업고 숙소로 향했다.

부르봉 다리를 다시 건너려는데 아까는 없었던 동상이 있었다. 어딘지 수상해 보였는데 우린 동상이다, 아니다라고 내기를 하면서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잠시 후 부모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이 동상을 구경하다가 동전통에 동전을 집어넣자 동상이 갑자기 움직이더니 사탕을 주었다. 유라는 그게 엄청 신기했는지 자리에서 떠날 줄 몰랐는데 겁이 많아서 막상 가까이 가진 못했다. 우리가 동전을 쥐어주며 한번 가보라고 부추기자 머뭇머뭇 다가가 동전을 넣었다. 동상은 유라에게 손인사를 하고선 사탕 꾸러미를 주었다. 신난 유라는 어느새 잠이 깨서 숙소로 가는 내내 동상 이야기를 했다. 동전통 앞에 'solar' 어쩌고 적혀 있어서 우린 그를 솔라맨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 뒤로 우린 그 다리를 지날 때마다 솔라맨이 있는지 찾았다.

밤이 되니 더 화려해지는 도시. 좁은 골목 사이사이 자리한 야외테이블마다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솔라맨은 체구가 엄청 작아서 마치 아이 같았다.

숙소로 돌아가다가 아까 낮에 봤던 도메니코 모듀노의 동상 앞에서 유라 사진을 찍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저 앞에서 팔 벌린 사진 한 장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다시 졸음이 쏟아진 유라는 억지로 팔을 벌리고 섰다. 아직 9시밖에 안 됐지만 한국이라면 이미 새벽 4~5시인 셈이니 졸릴 만도 하다. 졸린 유라를 둘러업고 우린 서둘러 숙소로 향했다. 아까 낮에 잠깐 몸을 담갔던 Cala Paguro 해변이 밤의 어둠에 잠겨 조용했다. 한낮의 활기가 사라진 밤의 해변은 왠지 모를 쓸쓸함을 머금고 있었다. 규칙적인 밤의 파도 소리에 우리의 발소리가 조용히 섞여 들었다. 조용히 왔다가 쓸쓸히 물러가는 파도처럼 이 순간도 사라질 거라 생각하니 조금 서글퍼졌다. 술을 먹어서일까. 괜스레 감상적인 기분에 젖어들었다. 좁은 골목길에 홀로 선 조명에 우리 가족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바닥에 새겨졌다. 그 모습이 예뻐 보여 등에 업은 유라를 잠시 내려놓고 사진을 찍었다. 순간을 영원히 박제할 순 없지만 언젠가 이 사진을 보면 우리가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에 변함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을 테다. 그렇게 추억을 하나 더 새겨 넣었다.

이 사진처럼 순간을 영원히 붙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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