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처의 남자가 언성을 높이는 동안 김은 아래를 보았다. 저녁노을을 받아 길게 늘어진 김의 그림자를 거래처 남자가 밟고 서 있었다. 남자는 김에게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아까부터 혼자 떠들고 있었다. 김은 빠르게 흘러넘치는 남자의 말 곳곳에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심어 넣었다. 그렇게 오분을 더 고개를 조아린 뒤에야 김은 남자의 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미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김은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거래처의 주문을 잘못 들어 발주 실수를 한 경위를 써 올려야 한다. 내일 아침에 바로 볼 수 있게 책상에 올려둘 것. 팀장이 퇴근하면서 문자를 보냈다. 김은 길게 뒤처진 그림자를 질질 끌며 전철역으로 내려갔다.
김은 오전 내내 어제 작성한 보고서를 팀장의 구미에 맞게 다시 수정하느라 점심시간에 혼자 늦어졌다. 구내식당에 들어서자 팀원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수다를 떨며 밥을 먹고 있었다. 김이 배식을 마치고 합석하자마자 팀원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먹고 와. 박이 일어서며 말했다. 커피나 먹고 들어갈까? 우리 저번에 받은 쿠폰 다 모았는데. 팀원들이 웃으며 구내식당을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김은 밥을 씹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김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어깨에 걸린 그림자가 무거워 김의 고개는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거래처에 새로운 제안서를 제출하고 돌아오니 다들 퇴근하고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다. 김은 자리에 앉아 화면보호기가 켜진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했다.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온 붉은 노을이 사무실의 모든 사물에 길고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김은 순간 숨이 턱 막혀 의자를 박차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온통 붉게 물든 하늘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김의 그림자가 김의 발끝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라 제 몸을 부풀렸다. 김은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봤다.
사무실로 내려간 김은 서랍에서 커터칼을 꺼내 다시 옥상으로 올라갔다. 김의 그림자가 발밑에 엉겨 붙어 김을 잡아끌었다. 드르륵. 김은 커터칼을 들고 발끝에 칼날을 댔다. 그림자는 쉽게 잘라지지 않았다. 두꺼운 하드보드지를 자를 듯이 김은 커터칼을 서너 번 계속 움직였다. 조금씩 그림자가 잘려 나갔고, 결국 무거운 그림자는 김의 발끝에서 떨어져 나갔다. 김은 커터칼을 내던졌다.
김의 몸이 조금씩 떠올랐다. 김이 아래를 내려보니 떨어진 그림자가 황망하게 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노을은 온 세상에 짙고 무거운 그림자를 계속해서 만들었다. 김은 시커먼 그림자들을 피해 점점 하늘로 올라갔다.
피처럼 붉게 물든 하늘이 뚝뚝 떨어지며 김의 몸을 적셨다.
김은 있는 힘껏 하늘을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