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보트 체험을 마치고 셔틀을 탔던 곳에서 내려 그대로 라마 모나킬레 해변으로 갔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 폴리냐노 아 마레에 도착한 후로 며칠 동안 그 풍경을 충분이 눈으로는 담았지만 직접 들어가 보진 못했으니 오늘은 한 번 가보기로 했다.
부르봉 다리를 지나자마자 피자 전문 식당이 있는 쪽으로 꺾으면 다리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가면 모나킬레 해변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햇볕 쨍쨍한 한 낮이라 해변에는 이미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풀리아 지방에 있는 많은 해변들이 자갈로 이뤄져 있는데, 특히나 이곳 모나킬레 해변은 자갈이 크고 거칠어서 길이 좀 더 험했다. 아쿠아 슈즈를 신어서 발바닥이 조금 아팠지만 어찌어찌 바다 쪽으로 나아가서 자리를 잡았다. 얇은 비치타월을 대충 깔고 짐을 놓은 다음 우린 바로 바다로 들어갔다. 파도가 은근히 세서 몇 번이나 해변으로 밀려나가기를 반복하다가 물속으로 들어갔다.
해변과 마찬가지로 바다 바닥도 크고 작은 바위들과 자갈들로 이뤄져 있어서 자칫하다가는 발이 다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여행 오기 전에 읽었던, 이탈리아 풀리아에서 바다에 가려면 아쿠아 슈즈는 필수템이라는 구글 리뷰에 새삼 감사했다. 유라는 목 튜브를 착용하고 있어서 바닥에 발이 안 닿아도 안심이었는데, 그새 수영을 배웠다고 깊은 물도 제법 자유롭게 수영하면서 다니는 모습이 기특했다. 그래, 아빠 엄마는 수영이 서툴지만 너만이라도 자유롭게 수영을 하거라.
아내와 유라가 해변가에서 노는 동안 나는 물에서 나와 동굴터널로 들어갔다. <텐트 밖은 유럽 - 로맨틱 이탈리아>에서 이주빈 배우가 동굴터널로 들어가 다이빙 포인트에서 뛰어드는 모습을 봐서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컴컴한 터널을 지나자 제법 평평한 바위가 이어졌는데 그 앞은 약 2미터 정도의 수심이었다. 아내와 유라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안 쪽으로 더 들어갔는데 바위가 아주 미끄러워서 거의 기다시피 이동했다. 자리를 잡고 멀리 있는 유라와 아내를 큰 소리로 부르며 손을 흔들어도 이쪽을 바라볼 기미가 없었다. 괜히 엄한 외국인들만 쳐다보길래 부르기를 포기하고 그냥 바닷속으로 뛰었다. 그토록 염원했던 라마 모나킬레를 온몸으로 껴안는 순간이었다. 적당히 시원한 바닷물과 수많은 물고기들이 동양에서 온 이방인을 반겼다. 사진으로만 보던 이 바다 안에 지금 내가 있구나. 사진 속으로 뛰어들었구나. 내가 사진의 일부가 되었구나. 누구에게는 평범한 바다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이곳, 머나먼 이국까지 오게 한 원동력이자 추진력이었다. 수면 위로 떠오르자 머리 위에서 하얀 태양이 절벽 사이에서 뜨거운 햇볕을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 아래에선 푸른 아드리아해가 천연덕스럽게 햇볕을 받으며 출렁거렸다. 그 순간 난 영원히 이 바다를 사랑하고 그리워할 거란 걸 직감했다.
헤엄을 쳐서 아내와 유라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조금 더 놀다가 지쳤는지 비치타월을 깔아 둔 곳으로 돌아갔고 유라와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닷속 물고기 떼를 쫓아다녔다. 모래가 아닌 바위와 해초가 많아서인지 물고기도 상당히 많았고 크기도 꽤 컸다. 파도에 몸을 실어 둥둥 떠다니다가 지겨우면 물속에 얼굴을 담그고 물고기들을 따라다니다가 귀엽고 재미있게 생긴 돌들을 찾아다니며 바닥을 누비고 다녔다.
꽤나 유명한 해변이라 그런지 한국인 커플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동안 바다에서 놀면서 한국인은커녕 동양인을 본 적이 없었는데 한국인을 보자 괜히 반가웠다. 다들 젊은 커플인 걸 보니 신혼여행을 온 것 같았다.
유라와 한참을 놀고 나오니 어느새 3시간이 지나있었다. 물속에서만 3시간 있었던 셈이다. 모자도 안 쓰고 선크림도 안 발랐더니 안 그래도 검은 피부가 아예 까맣게 타버렸다. 아내가 아무리 봐도 한국인이 아니라고 웃었다. 우린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고 주섬주섬 짐을 챙겨 자리를 떴다. 3시간이나 놀아서 아쉬움이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떠나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 또 여기를 올 수 있을까. 여행의 좋은 점은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을 갈 수 있다는 거지만, 여행의 안 좋은 점은 언제 또 여기를 올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항상 남는다는 점이다. 눈에 라마 모나킬레의 바다를 꾹꾹 눌러 담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목이 말라 젤라토를 사 먹었다. 평소 구도심지와 숙소를 오갈 때마다 지나쳤던 곳인데 항상 사람이 많아서 궁금했던 곳이었다. 수영복을 입은 채로 바닷물을 뚝뚝 흘리며 길 한편에 서서 먹는 젤라토 맛은 아주 일품이었다. 유라는 초코맛 젤라토를 입에 잔뜩 묻혀가며 열심히 먹었다. 젤라토는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아서 아이스크림보다 훨씬 빨리 녹는다고 한다. 그래서 언제나 젤라토를 먹을 때면 옷에 묻지 않게 목을 잔뜩 빼고, 손가락으로 살짝 쥐고 조심스럽게 먹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차피 다 젖은 수영복을 먹고 입으니 걱정 없어 수영복에 뚝뚝 묻혀가며 먹고, 손에 묻은 건 수영복에 슥슥 문질러 닦았다.
숙소에서 쉬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나왔다. 폴리냐노 아 마레 구도심지에서 그동안 우리가 가보지 않았던 좁은 골목 깊숙이 들어가자 어느 식당의 야외 테이블 옆에서 버스킹 공연을 하고 있어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조금 일찍 저녁을 시작했는데 우리가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많이 몰리며 대기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먹던 습관대로 7시쯤 저녁을 먹었는데 이탈리아인들은 보통 저녁 식사가 7시 30분에서 9시 사이에 시작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자리를 잡을 때쯤에서야 사람들이 몰리곤 했다.
아쉽게도 유라가 좋아하는 오레끼에떼가 없어서 홍합 파스타를 주문하고, 아내와 나는 피자와 문어 버거를 주문했다. 재료 본연의 맛을 중시하는 이탈리아 식문화 때문인지 피자에 도우가 거의 없었고, 문어 버거에도 소스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어딘지 심심하고 부족한 듯한 이탈리아 음식의 매력의 흠뻑 빠진 난 화이트 와인 한 병과 생맥주까지 곁들여서 아주 맛있게 그릇을 싹 비웠다.
와인과 맥주에 기분 좋게 취한 나는 아내가 봐둔 모히또 맛집을 찾아 한 잔을 더 하기로 했다. 모히또만 파는 테이크아웃 전문 바인데 모히또의 종류가 엄청 많았고 평도 꽤 좋았다. 바에 들어서니 어떤 젊은 여성이 귀여운 강아지를 데리고 있었다. 우린 주인에게 녀석을 만져도 되냐고 물어보고 쓰다듬었다. 사람을 좋아하는지 낯선 우리에게도 쉽게 턱을 맡겼다. 모히또만 파는 곳이라 아내와 내 것만 주문을 하는데. 한국인이 많이 찾는지 직원이 우리에게 먼저 한국에서 왔냐고 물어봤다. 화려한 손놀림으로 칵테일을 만드는 직원의 모습이 신기해서 나와 유라가 탄성을 내뱉으며 구경했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직원이 유라 용으로 알코올이 안 들어간 모히또를 서비스로 만들어줬다. 유라는 사이다도 아직 못 먹어서 잘 먹을지 걱정이었는데 무척 맛있다며 호로록 빨대를 빨았다. 난 직원의 친절이 고마워서 가게 한편에서 파는 병따개 키링을 샀다.
모히또를 사서 광장 계단에 앉았다. 예쁜 도시의 밤을 만끽하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한적한 시골 마을도 좋지만 이렇게 화려하고 왁자지껄한 관광지의 밤도 아름다웠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빨대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엉덩이를 훌훌 털고 숙소로 향했다. 졸린 유라는 얼른 숙소로 가서 자겠다며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졸리면서 뛰는 게 가능한가? 난 그 모습이 귀여워서 뒤를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유라가 잠든 숙소의 밤. 어디선가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호기심 천국인 아내는 또 호기심이 발동해서 침실 창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저 멀리 해변 쪽에서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다. 무슨 축제인지 행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늘을 물들이는 불꽃은 예뻤다.
별처럼 빛나는 도시 위로 예쁜 불꽃이 떠올랐다가 화려하게 터지며 사그라들었다. 불꽃을 보자 아까 라마 모나킬레 해변을 떠나며 들었던 생각이 다시 찾아왔다. 우리의 즐겁고 행복한 이 순간도 저 하늘의 불꽃처럼 화려하게 피었다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겠지. 하지만 어두운 밤하늘에 불꽃의 잔상이 남듯이 우리의 긴 시간 속에 이 순간은 영원히 잔상을 남길 것이다. 불꽃보다 더 화려하고 멋진 기억의 잔상.
그렇게 기억은 추억이 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