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언제나 - 사뮈
-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고 사람을 숨기려면 도심에 숨기면 된다. 우리는 늘 숨김당한다.
한없이 커져가는 도시와 다시 압축되는 공간 속에 우리는 작아진다. 서울에 있지 않아도 서울의 소리와 모습을 볼 수 있고 그로 인해 커다란 사람만 더더욱 커져간다. 사소한 재능따위로는 빛조차 보기 어려워지고 우리의 목소리는 끝없이 작아진다. 우리가 닿을 수 있는 세계만큼이나 우리는 그 속에서 한줌의 먼지가 되어버린다. 알게된 만큼이나 무지함을 깨닫고 통찰력이 깊어질수록 외로워진다. 솔직함은 때론 고통이고 감정은 도구가 되어간다. 어렸을 적 시절의 소중함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나를 찾기 위함은 단순히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것과는 다르다. 트랜드를 거스르기 위한 홍대병조차 유행이 되어 자신의 유니크함에 취한 이들의 것은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소비할 때 소비의 대상이 좋은 것인가 아니면 그런 행위를 하는 자기 자신에게 취한 것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위함인가 아니면 집단으로부터 외면받지 않기 위함인가. 누군가를 평가할 때 자신과 다름을 두고 평가하진 않는가.
오리지널리티가 남발되는 카피의 세계 속에서 진짜로 고유한 것은 무엇일까. 어느순간엔 누가 먼저인지도 사람들은 기억해내지 못한다. 내가 그려낸 그림은 과연 그 어떠한 것도 닮지 않았다 할 수 있을까.
내가 뭘 잡고 있는걸까. 어떤 것에 매달리는 것일까. 내가 이 순간 왜 괴로운 것일까. 내가 괴롭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이기에 괴롭다 말하는가. 그 감정을 도구처럼 쓰고 있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이 다 허상임을 늘 다시 복기하고 복기해야만 잊지 않는다. 내가 보고 있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들, 모두 나라는 존재가 있기에 발생하는 해석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것은 거짓이다. 내가 느끼는 고통은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에 발생하는 것이고 내가 슬픈 것은 그러고자 함에 그리 이르는 것이다. 나는 그러고 싶으니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나는 왜 그러고 싶어졌는가.
내가 뭘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 사람도 사람 나름이지만 최소한의 알고리즘은 존재한다. 사실 별다른 깊은 생각없이 사는 사람들은 인간보단 기계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무엇인가를 두고 의견을 내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부터 나오는 이들. 그렇게 이어진 갈등 속에서 해답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들을 외면하고 해결이 된다면 그때 이용한 감정을 도구로 삼는다. 그런 1차원적 작동방식에 대한 개선의 여지조차 없다면 우리는 그들을 인격체로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욕구에 충실하고 감정을 도구 삼으며 타인의 입장은 안중에도 없는 컴퓨터만도 못한 인간들.
자존감이 갈려나가는 것은 그런 사람들의 주변인들이다. 선택에 두려움을 느끼다못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조차 망각하고 때론 모든 감정을 삭히며 살아간다. 가끔 서울에 사는 사람들의 절반 이 두부류로만 분류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다. 누구하나 자존감 높은 적이 없는 이들. 자존심만 높거나 그거조차 사라진 이들. 그들이 자존감을 찾을 곳은 내가 보기엔 적어도 이 곳은 아닐 것이다. 서울이란 대도시는 크면서 좁고 사람은 많으면서 적고 재능있고 잘난 이들은 늘 넘쳐난다. 늘 나보다 뛰어난 누군가가 내 앞에 서있고 끝이 보이질 않는다. 왜 우리는 비교가 습관이 되었을까.
웃음이 나쁜 것은 아니다. 입만이라도 웃는 게 어떤가. 근육통이 올만큼 억지로 일어나는 부자연스러움이 문제인 것이다. 눈물이 나올만큼 웃는 것도 드문 일이다. 조용한 세상 속에서 가장 척을 잘하는 이들이 무언가를 가져가는 것.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배우이기도 하다. 연기란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란 걸 느낀다. 행복함조차 연기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끝이 나길 바라는 모든 것들이 사실 다른 것의 시작이 될테고 가끔은 끝이 두려워지기도 한다. 그렇게 참고 참아도 늘 새롭게 참을 것들이 생겨나고 놓아버리면 미래조차 놓아버리는 기분이 되곤 한다. 낭만을 찾아 떠난 곳에 절망뿐인 경우도 너무나 많다. 잘하고자 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일치하는 이들은 보통 매체를 탄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끔은 운명론같이 우리의 삶이 유전자단위로 정해져있고 우리의 역할은 선천적인 것이라 여기는 이들이 있다. 소위 말하는 덕업일치가 반드시 행복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덕을 위해 업으로 노력하는 이들도 반드시 존재하며 오히려 분리가 더욱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렇게 하면 행복할까?
이 도시에서 느끼는 행복은 마이너스를 제로로 만들기 위한 요소로 사용됨은 분명하다. 그런 이들이 눈에 치이도록 많이 보인다. 이 겨울의 빌딩풍에서 옷을 여밀지 않는 자가 없으니 도시란 곳의 잔인함일까. 가끔은 남쪽의 고향이 그립다. 눈물이 나도록 웃었던 적은 그곳에 더 많이 남아있는 것 같은데. 다만 이것도 모두 허상이겠거니. 나는 아직도 내 자신을 올바로 보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