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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표시형 Mar 18. 2019

스물 아홉의 후회

외면하고 있는 것들은 밤에 찾아온다.

일요일과 월요일의 새벽 네시. 
잠이 오지 않았고, 억지로 눈을 붙잡고 있을 바에는 뭐라도 남겨놓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오랜만에 브런치에 들어왔다. 브런치는 이럴 때 참 좋다. 많은 사람이 보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아무도 안보는 건 좀 외로운 마음이 들 때 글을 쓰기 참 좋다.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예정된 미래. 마지막 20대를 보내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스물아홉이 되었을 때 난 굉장한 사람이 되어있길 간절히 바랬다. 내가 말하는 굉장함이란 아주 유치하고, 일차원적인 굉장함인데. 뭐 그런거, 성대한 생일 파티를 보낼 수 있는 사랑 받는 사람이라거나, 많은 사람들이 영감을 받은 브랜드나 제품이라거나, 진짜 바라보고 쳐다보면서 이건 우리가 한거야라고 너무 뿌듯하게 웃음지으며 자랑할 수 있는 그런 결과물들이 남아있길 바랬다. 이제 스물아홉이 된 내가 그래서 무엇을 이뤄냈는가 혹은 무엇을 남겼는가.  돌이켜보면 남는 건 뿌듯함보다는 아쉬움의 순간들이다. 그 대부분은 나의 나태와 게으름, 조바심 같은 것들로 인해 생긴 것들임을 알면 마음이 쓰리다.  감사함을 남기지 못하고, 자격지심만을 쌓아둔 채로 이십대를 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때면 난 나의 30대가 추해질까봐 더욱 두려워진다. 이십대 중반에 어떤 잡지에서 봤던 문장 하나가 꾸준히 떠올랐다. 그 문장은 '이십대는 지옥 같았다. 삼십대가 되고 나니 훨씬 괜찮아졌다.' 라는 문장 비스무레한 것이었는데, 이제 '삼십대가 되고 나면 훨씬 괜찮아졌다' 라는 문장이 나에게 위안을 주고 있다. 씁쓸하면서도, 그렇다.

정말이지 부끄러움 뿐이다. 일에서의 멋진 성취도, 삶에서의 감사한 기억들도, 스스로 느꼈던 상처만큼의 성장도 뭣하나 만족스럽지가 않고 부끄럽기만 하다. 어떻게 해야하는지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마 아쉬움을 느끼나보다.


틈틈히 운동을 하고,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 속이 답답하다고 담배를 덜 태우고, 디지털 기기와 단절된 채 사유하는 시간을 꼭 가졌다면..  몇가지 더 쓸 수 있지만, 이것들만 지켰더라면 난 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었겠지. 하나만 굳이 더 추가하자면, 생각해야 될 문제를 술 마실 일로 치환하지 않았었더라도.


사람들을 더 사랑할 걸 그랬다. 좋은 친구를 만들 수 있었는데, 난 자꾸 계산했다. 그 계산이란게 상대를 어떻게 이용할까, 이 사람에게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같은 계산이었다기 보다는, 집에 가서 혼자 있는 게 더 좋을까 이 사람과 같이 있는게 더 좋을까 같은, 도전과 열정을 상실한 인간관계에서의 계산적 태도였다는 사실이 아쉽다.   


조바심을 덜 낼 걸 그랬다. 내 스물셋과 스물아홉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꿈은 태산 같았지만, 여전히 난 산의 초입을 오르고 있다. 같은 시간을 살면서도, 조바심 때문에 항상 긴장했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더 빨리, 더 잘하고 싶다, 더 멋지게 해내고 싶다라는 조바심은 항상 날 초조하게 했다. 놀 때도, 쉴 때도, 일할 때도. 긴장하게 했고 답답하게 했고 남과 비교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속도조차 향상시켜주지 못했다. 조바심은 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점점 더 커진다. 밀린 숙제가 쌓여가고 불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해소되지 못한 조바심들은 더 큰 조바심으로 다가왔고 난 전전긍긍하며 주말이면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서 핸드폰만 바라봤다. 이 얼마나 아까운 시간이었는지. 가슴 속 끊어오르는 열망 때문이었다고도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 조바심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 꾸미고 살 걸 그랬다. 흡연과 음주로 난 늙었다. 몸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벌써부터 느낀다. 극도의 스트레스와 긴장, 그리고 불규칙적인 삶 때문에 피부는 칙칙해졌고, 눈은 작아졌다. 배는 나왔고, 팔다리는 얇아졌다. 자꾸만 그렇게 생각했다. '외모 따위가 중요한게 아니라고'  외모는 나에게 매우 중요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했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너무 일찍, 나를 즐길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 하나를 포기해버렸다. 벌써부터 비어보이는 앞머리에 더이상 탈색한 노란머리를 시도할 용기가 들지 않는다. 이제는 구제 옷가게에 가서 옷을 사입으면, 다음 날 그 옷이 초라해 보이기 시작했다.


일 자체의 성취보다 일 자체의 즐거움과 호기심에 집중할 걸 했다. 어느순간 느끼는 책임감이 너무 커져서, KPI를 셋팅하고, 마일스톤을 정하고 수치화해서 내 일의 즐거움을 자꾸 달성했느냐, 달성하지 못했느냐로 기준삼아버렸다. 달성했을 때의 나는 다음 마일 스톤들을 바라보기 바빴고, 달성하지 못했을 때는 과정을 저주했다. 달리다 보니 사업은 생각보다 커졌고, 언젠가서부터는 '나 혼자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 때부터는 결코 즐길 수 없었다. 이른 창업의 장점이 실패 리스크 최소화였다면, 이른 창업의 단점은 너무 빨리 삶의 무게에 맞딱드린다는 슬픔이었다. 애 어른 같은 건가.


좋은 취미 하나를 잘하는 수준까지 익혀볼 걸 그랬다. 말로는 탱고를 배워볼까, 작곡을 배워볼까, 디제이를 해볼까 수십번 생각했는데, 평일에는 일 뒤에 숨었고 주말에는 게으름에 졌다. 나를 위안할 수 있는 방법들을 만들어 두지 못하니, 삶이 자꾸 뻔해졌다. 아무 약속도, 마음의 부담도 없는 행운 같은 여윳시간이 나를 찾아왔을 때, 난 다시 외로움을 느꼈다.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경제경영서를 집거나, 미드를 몰아볼 때.  멋지게 살고 있다라는 느낌은 들지를 않았다.


비교하지 말껄 그랬다. 왜 그랬을까. 왜 이토록 치기 어린 행동을 서슴없이 했을까. 
자꾸 비교했다. 나보다 부족해 보이는 누군가를 보며 답답해했고, 나보다 잘나보이는 누군가를 보며 나는 왜 저렇게 해내지 못하는가 자책했다. 언제나 나의 정원은 남의 정원을 구경하느라 황량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비교하는 행위는 정말 최악이었다. 위를 보고 자책하고, 아래를 보며 답답해하는 과정 속에서 난 허우적 대는 느낌으로 살았다. 


쓰다보니 마음이 후련해진다. 영화관에서 슬픈 영화를 한편보고, 시원하게 눈물을 빼면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뜨거운 사우나에서 구석구석 몸을 닦고 나온 바깥 같은 기분이다. 난 포기하지 않았다. 후회한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고 바꿀 수 있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종종 써내야겠다.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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