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처음 본 건 삼년 전 겨울, 삶이 엉망이라 느끼며 망가질 대로 망가졌을 때였다. 흰 패딩, 패딩만큼 하얘보이는 얼굴, 자그마한 얼굴 그 얼굴만큼 작은 체구 그 옆에서 난 담배를 피웠다. 걘 긴걸 피웠다.
애인있어요? 있어요. 저도 있는데. 누가 먼저 물었는지 모르겠는 대화의 맥락 사이에서 어쩌면 그때 난 아쉬움을 느꼈을지도, 혹은 그녀의 아쉬움을 느낀걸지도.
그렇게 대화와 만남은 끝이났었다.
몇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우연히 만났다.
비지니스 미팅에서였다.
내 연애는 그리움 없이 후련히 끝났었고, 어떤 연애든 끝난 뒤 찾아오는 뻔한 허전함 같은 걸 느끼면서, 삶이란 뭘까?라는 우울한 생각의 도피처에 숨어 살던 나는 우연히 그녀를 다시 만났다. 클리셰 같이 때마침 초봄이었다.
높은 구두에 오피스룩을 세련되게 입은 걔는 참 예뻤다.
남자친구 있는 애한테 찝적거리는건 예의가 아니니, 일 얘기를 꾸역꾸역하고 헤어지던 찰나.
내가 말했다. 금요일이죠, 미팅 빨리 끝내드릴께요. 직퇴하시고 금요일 즐기셔야죠.
그녀가 말했다. 어짜피 저 할 것도 없어요.
음악을 틀지 않는 엔트러사이트 서교에서, 우린 망원동 오라방으로 이동했다. 저녁이나 먹자고 했다.
걔도 남자친구가 없어졌다했다
고기국수와 수육을 먹었다. 맥주도 하나 시켰다.
정말이지, 그때까진 사심 없었다. 소주도 한병 비웠다.
그녀와 한잔 더 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제비다방엘 가고 싶었다.
하우스 와인 두잔 시켜놓고 뒷켠의 야외 테이블에서 담배를 피면서 와인을 마셨다. 비가 왔다. 부슬부슬.
프랑스 시인이 된 기분이었다.
삼차를 가는길. 힐이 불편하다고 했다. 그럼 벗어라고 했더니 그녀는 정말 벗고 양말로 걸었다.
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다음날은 수제버거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연남동 뉴스보이펍 옥상에서, 거긴 꽤 괜찮은 센스를 가진 가게다. 우린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고 같이 춤을 췄다. 센프란시스코에 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음주 이태원에서 더럽게 맛없는 닭갈비를 먹고, 샘라이언에서 맥주를 먹고 나는 말했다.
결혼하자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밝게 빛나는 나만의 태양, 희고 찬란하게 빛나는 작은 태양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날 따라 길거리 악사들이 흥겨웠다. 우린 이태원 길거리에 앉아, 우리만을 위한 공연을 보며 사랑을 속삭였다. 그 악사에게 만원짜리를 넣어주었다.
그렇게 우린 봄을 보냈다. 함께 집을 꾸미고 연남동을 걷고 장마를 구경하고 빗속에서 노래를 부리며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했다.
오래된 매트리스 위에 천을 덮어 쇼파대용으로 썼다.
빨간 쇼파 위에 앉아있던 걔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가보지도 않은 일본의 벗꽃길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을 느꼈었다.
주말에는 홍대 곳곳의 빈티지 가게를 돌아다녔다.
서로의 옷을 골라주었다. 어느날엔 이태원 우사단길의 작은 빈티지샵에서 오래된 남방과 원피스를 샀다. 그곳에서 우린 옷을 갈아입고 클럽에 갔다. 갈아입은 옷에 빨간 매니큐어로 낙서를 했다. 북적이는 바 안에서 작고 하얀 체구가 살랑거렸다. 정말이지, 그날 하루의 시나리오를 영화학도가 봤다면 분명히 그의 첫 영화에는 이 장면이 들어갔을거라고. 살랑거리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생생히 기억나던 시작.
그리고 그 기억들이 드문 드문해질 시점부터 우리는 삐그덕 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