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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표시형 Jul 20. 2024

초현실적인 상상

#1

 출근 마지막 날이다.스물 다섯의 여름, 나는 학창시절부터 로망이었던 레코드 가게 아르바이트를 했다. 두 달 간 오래된 LP들을 만지고, 음악을 좋아하는 다양한 손님들을 구경하며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그래서 시간도 빨리 흘렀다.다시 학교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가을인 것이다. 별 다를 것 없이  레코드를 정리하고, 손님을 응대하고 재고를 확인했다. 마지막 출근을 끝내고 함께 일했던 그녀와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처음이자 마지막 일을 했다. 그녀에게 번호를 물었다.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왜요?”

“계속 연락하고 싶거든요”

그녀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포스트잇에 번호를 적어 주었다.

“그동안 한번도 안물어보다가 마지막날 이러는거 좀 별로에요”

“거절하면, 서로 불편해질까봐 그랬어요”

“칫, 뭐 번호받는게 고백도 아니고”

“그래도 주셨네요?”

“네에. 연락주세요”
그녀의 얼굴엔 계속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인사를 하고 집에 가는 길, 쪽지를 펴 보았다. 쪽지에는 번호의 마지막 자리가 적혀 있지 않았다.

일주일 뒤, 나는 일곱번의 시행착오 끝에 그녀의 휴대폰 마지막 번호가 6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뭐야, 왜 이제야 걸었어요?”


"매일 끝자리를 한개씩 맞춰봤거든요"


“왜 하루에 한개씩 한거에요 답답하게”


“저 보고 싶었어요?“
-


#2

 그녀는 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외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표현이 좀 이상한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외로울 이유가 없는데 외로워 보였다. 매력적인 외모, 그 매력을 극대화 시키는 남다른 취향, 트랜디 하면서도 고유함이 느껴지게 스스로를 꾸밀 줄 알았다. 풍부하고 상냥한 표정을 지을줄 알았다. 하지만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게 묘했다. 내가 그녀의 외로움을 발견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그 전까지 난 그녀를 세상에 사랑으로 빚어진 생명체가 있다면 저런 느낌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를 처음 봤던 것은 친구 따라 끌려간  유학생 파티였다. 기억난다. 그녀는 붉은 옷을 입고 사람들 속에 둘러쌓여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밝게 웃고 상냥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랑 받고 자라서 세상을 사랑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 그녀의 첫 인상이었다.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지하에서 빠져나와 담배를 피는데, 우연히 그녀가 혼자 담배를 피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짙은 어둠이 서려 있었다.  깊은 심연 속에 혼자 너무 오래 갇혀있어 표정을 잃은 사람 같았다. 믿기지 않았다. 불과 몇 분전까지 그녀를 밝히던 태양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 순간부터  그녀가 외로워 보였다.  너무 큰 온도차를 가진 그녀의 분위기. 그 틈 사이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3

우린 작은 옥탑방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창문형 에어콘이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었고 윙윙 매미가 울었다. 창을 투과한 밝은 빛이 집안 전체를 비췄다. 바닥은 노르스름 따끈했고 귀 뒤엔 옅은 땀이 맺혔다. 우린 침대 옆 맨바닥에 나란히 누워 여름소리를 관찰했다. 귀가 간질거렸고 이따금 불어오는 선풍기 바람이 졸음을 깨웠다. 오른쪽 귀에선 그녀의 숨소리가 들렸다.몇분이나 흘렀을까. 이내 순식간에 방이 어두워지더니,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졌다.


티잉 팅- 창을 때리는 물방울 소리가 매미소리를 대신했다. 한마디도 하지 않던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비를 구경하고 싶어” 뭔가에 이끌린것 마냥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러곤 빗방울이 흐르는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 비내리는 서울을 구경했다.그 모습이 고양이 같았다. 타닥타닥 연초 타는 소리가 들렸다.후두두둑,타닥타닥. 처벅처벅. 가만히 비를  바라보던 그녀가 쏟아지는 빗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쏴아아아.투명했다.그녀의 푸른빛 원피스가 짙은 파란색으로 흠뻑 젖었다. 그녀는 계속 춤을 췄다.  너무 적극적이지도, 너무 소극적이지도 않게. 마치 비가 그치면 함께 사라지는 존재처럼. 난 두려웠다.이 비가 그치고 그녀가 여름날 소나기와 함께 증발해버리면 어떡하지.그녀가 수줍은지 나를 바라보며 웃는다. 나도 그녀를 바라본다. 절대 그녀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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