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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표시형 Sep 16. 2024

자기 소개

당신은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는가? 

진부한 얘기지만, 난 내가 뭔가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스무살, 처음 대학교에 입학했었을 때가 생각난다. 제주도에서 자란 나에게 서울은 신기한 땅이었다. 티비에서만 보던 광경이 내 눈 앞에 펼쳐졌을 때가 여전히 생생하다. 당시 제주도 아이들의 지상과제는 '인서울'이었다. 어떤 꿈이나 목표가 있어서라기 보단 제주를 떠나 서울로 상경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서울로 대학을 가는 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막연히 '서울로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고 그럭저럭 수능을 보아 서울로 왔다. 꿈이란 거창한 단어는 없었다. 그저 '저기 가서 술먹고 싶다' 정도의 상상만 존재했다. 두가지 기억이 있다. 발 디딜틈 없이 거리를 매운 사람들과 끝도 없이 길게 이어지는 '번화가'의 모습. 남중 남고를 나와 '여자'와 말을 해볼 경험이 거의 없었던 내 눈 앞에 나타난 세련된 선배들. 영화 속에 나올 것 같은 막걸리집에 앉아 있었던 선배들의 모습을 기억한다. 이내 그 풍경은 익숙해졌다.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순간이 있다.  마음 속, 한 인간이 일생을 사진첩으로 만든다면 난 이 순간을 20살의 사진으로 넣을 것이다. 

그 장면은 바로 1학년 새학기 동기들과 학교 언덕을 걸어 올라가면서 보았던 빨간 스포츠카다. 외제차를 볼 일이 거의 없었던 내게 스포츠카는 정말 새로웠다. 땀을 뻘뻘 흘리며 언덕을 동기들과 올라가고 있는데 멋들어진 배기음의 스포츠카를 본 순간을 신기하게 처다보고 있는데 주변 친구들이 이런 말을 했다. "쟤는 부모 잘 만나서 우리는 평생 타볼 일이 없는 차를 타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난 좀 의아했다. 이제 시작인데 왜 벌써 "할 수 없다" 생각하지? 이제 스무살인데, 정말 저 차를 타고 싶다면 언젠간 탈 수 있지 않을까? 동시에 그런 의아함도 가졌다. 도대체 외제차가 뭐길래 랩 가사에서도 그렇게 이야기 해대고 스무살의 친구들이 저렇게 비관적인 표정으로 한숨 쉬듯 이야기 할까 ? 


그렇게 칠년이 지나 스물일곱, 운전도 모르는데 당시 코파운더 형과 검은 벤츠를 샀던 기억이 난다. 

벤츠는 내가 그간 탔던 다른 차들과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여기에 목숨을 걸까? 내가 너무 촌놈이라 둔감한 건가. 라는 생각. 그리곤 생각했다. 

할 수 없다 생각하면 할 수 없고 할 수 있다 생각하면 정말 할 수 있다. 거기서 끝이었다. 그 확신이면 충분했다.


여기까지 읽고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 자식 봐라, 결국 뻔한 자기계발적인 이야기 하네?" , 걱정 마시라. 


지금 난 벤츠를 가지고 싶다. 가끔씩 지나가는 좋은 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저 놈은 틀림없이 운이 좋아서, 세상과 타협해서 저 차를 타게 되었겠지?  얼마나 치사한 일을 많이 했을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올 때가 있다. 난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인간이 되었음에 깜짝 놀란다.  동시에 난 왜 이렇게 된거지 ? 라는 자괴감이 올라온다. 그럴때마다 소름이 끼친다. 스무살의 봄, 처음 포르셰를 보았을 때 내가 가졌던 생생한 기억과 지금의 내가 대조되며 쓴 침을 삼킨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나는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다" 라는 생각을 품고 살아본적이 있는가? 

누구나 무언가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꿈을 쓰라 하면 우주인이 한가득이었던것 처럼, 그리고 학년이 올라갈 수록 우주인을 꿈으로 쓰는 친구는 점점 줄어든다. 

꿈꾸었던 것을 이룬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수반되며, 설사 내 딴에는 최선의 노력을 했다 하더라도 노력은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확신이 사라진 자리를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채워넣는다. 어렸을 적 최초의 크기로 그 공간은 그대로 존재하고 확신이 빠져나간 자리는 다른 무언가로라도 꼭 채워야 한다. 살아가기 위해서다. 점점 깎여나가 작아진 그 공간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한다. 


누군가는 사회에 대한 분노로, 누군가는 자신이 이룬 성취를 매우 크게 평가하는 것으로 또 누군가는 염세론자가 되어 각자 상실한 공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누군가는 계속해서 그 공간을 원래 있던 확신으로 채우기 위해 살아가기도 한다. 


나는 이십대 내내, 내가 뭔가 멋진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저 우주 멀리 있는 행성을 향해 일직선으로 항해하는 우주선처럼 정확히 그곳을 향해 가고 있다 생각했다. 지금은 아니다. 그러고 도무지 이해 되지 않았던 세상 사람들의 부정적인 말과 행동들의 원인을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외제차가 별 것 아니었던 것처럼 보였던 이유를 뒤늦게 알았다. 나는 굳이 증명할 필요성도 못느꼈었던 것이다. 굳이 비싼 외제차를 타며 "내가 이렇게 성공한 사람이야" 라고 외쳐야할 정도의 결핍도 없는 잘 보존된 "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야"라는 강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뭐든지 천천히 차츰차츰이 좋다. 특히 그것이 나쁜 것이라면. 나는 천천히 뎁혀지는 냄비 속 개구리가 되지 못했다. 내 꿈은 한순간에 박살났고, 너무 상쾌한 온도를 겁없이 살아가던 나는 어느날 끓는 듯 뜨거운 물 속에서 "나의 확신"을 상실했다. 내 마음 속 "나는 무언가 이룰 수 있는 사람이야" 그릇이 한순간에 비워졌고 텅빈 그 그릇을 한번에 채우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한가지 좋은 점도 있었다.

무너져보고 나서야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보여지는 것에 목 매는지, 그것은 크건 작건 상실한 마음 속의  "나는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야" 라 이름 붙은 영역을 어떻게든 채워넣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관념적인 이야기가 너무 길었나 ? 하지만 이것이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자기 소개이다. 

나는 한때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 속에 살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그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좌절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그 그릇 속에 염세와 비관 그리고 분노를 담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다. 


망했다. 라는 말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문장의 껍질을 벗겨내 보면 이런 문장이 튀어나온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다" 라는 스스로의 고장을 인정해 버린 인간. 

이것이 바로 "망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난 지금 그런 상황이고, 그래서 "망한 인간"이다. 이렇게 산지 오년이 되었다. 

통장에 또래 대비 꽤 많은 현금이 있었던 시절에도 난 이미 망해 있었다. 

망했다는 것은 상황과는 상관 없다. 그 상황을 바라보는 그 사람 머릿속 사고에 있다. 


그럼 이렇게 되물을 수 있을 것 같다. 


"왜 살아?"

그럼 난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망했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더라, 


내 삶은 망하고 더 행복했다. 아이러니한 말이다. 

수많은 "망한 인간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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