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해보자. 한 사람이 깊은 동굴에 홀로 갖혔다. 그 곳에서는 다행히 최소한의 물과 식량은 구할 수 있지만 같이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고, 짙은 암흑으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손을 더듬어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보지만 딱딱한 돌맹이만 만져질 뿐이다. 그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희망은 구조 되는 것이다. 그는 음식과 물을 섭취하며 구조를 기다렸다. 일주일, 보름, 한달. 시간의 흐름도 가늠할 수 없는 작은 공간 속에서 남자는 자신의 호흡소리만을 들으며 버티고 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버티기도 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을 생각하며 버티기도 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내가 너무 사랑하는 일상을 상상하며 버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 살아가야할 이유가 부족한 사람은 서서히 지칠 것이고 언젠간 "생존" 그 자체에 대한 욕망으로 버티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누구나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살아있는 이유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꿈이나 비전 같이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하다 못해 좋아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는 정도의 일상적 작은 행복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면 서서히 그 사람은 죽음과 가까운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희망 없는 생존은 동굴 속 삶과 같다.
사람을 살게하는 것은 희망 혹은 사랑이다 아주 사소하더라도 작게나마 누구나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 죽음을 깊게 고민했던 순간이 있었다. 살아갈 이유를 그 어디서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기력하게 방 안에 누워 나는 내 죽음을 머릿속으로 계획하고 실행하는 상상을 했다. 그 뒤에 벌어질 일들을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나를 붙잡았던 것은 어머니의 슬픔이었다. 그녀는 아마 평생을 슬퍼하며 살 것 같았다. 그녀는 가진 것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이유 하나였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삶을 계속 살고 싶은 이유는 아니었다. 타인에 대한 책임이었다.
책임감으로 억지로 살 순 있지만, 그 삶은 매우 고되고 건조한 삶이다. 죽음을 고민하며 1년이 지났고, 또 어찌되었건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1년이 지났다. 그러다 우연히 어떤 여자를 만났고 짧게 사귀었다.
그녀와의 시간은 내게 매우 큰 의미가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계절의 아름다움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녀와 함께 차를 타고 자유로를 가는데 창가 너머로 하늘과 강 그리고 새가 보였다. 아름다웠다.
그녀가 떠나고 나는 계절을 보는 재미로 살았다. 빛을 반사하는 잎사귀, 일렁이는 강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매일매일의 구름 같은 것들. 서른이 넘어서야 알게 된 살아가야 할 이유 중 하나였다.
대낮에 달리기를 했다. 해가 쨍쨍한 날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기를 하면 한강엔 노인들이 가득했다.
그들과 함께 나 또한 가만히 앉아 나무 잎사귀를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뒤로 죽음을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
그 뒤엔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는 동안은 한번도 내 외모에 대해 불만을 가진적이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내 몸뚱이만 남았다 생각하니 거울 앞에 선 내가 너무도 초라해보였다.
신기하게도 살이 빠지고 근육이 붙었다.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컨디션이 달리지는 것을 배웠고 만성 염증이 사라지고 두꺼웠던 뱃살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운동은 배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하면 커지고 안하면 작아졌다. 그 과정에서 난 결국 이 세상에 나를 떠나지 않는 존재는 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지독한 무기력증은 계속해서 찾아왔고 운동 말고 아무것도 안한 채 집에 누워 시간을 보낸 시간도 많았다. 그래도 내일의 날씨와 운동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었다.
웨이트 트레이닝, 야외 달리기, 폭음, 담배 이 네가지가 나를 살게 했다. 큰 꿈이나 비전, 거창한 기대가 없더라도 살아있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겁이 많이 났다. 지금의 삶은 허술한 각목으로 올린 탑 같았다.
누가 나를 사랑해 줄까? , 무능한 내가 밥벌이는 할 수 있을까? 두 가지 생각이 머릿 속을 지배했다.
키 181의 건장한 육체와 서른 두살의 나이, 심지어 통장에는 또래들 대비 꽤 많은 돈이 있었지만 여전히 머릿속엔 패배감에 휩쌓여 있었다.
돌아보면 그렇다. 상황은 결국 스스로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나에겐 여전히 희망이 없었다. 죽지 않을 정도의 살아야 할 이유만 있었을 뿐이다.
주변인들은 나를 믿어줬다. 나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기대감을 가졌다. 계속 도전을 해야한다는 강박을 스스로 가졌다. 나는 단 한번도 내가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는데 계속 도전을 했다. 당연히 실패했고 그때마다 패배감은 더욱 강화 되었다.
이 년이 지났다. 가진 돈은 모두 탕진했다. 하지만 나를 괴롭혔던 우울증은 없다. 금연은 실패했고 여전히 주에 최소 1회는 과음을 하지만 잠들어 있던 욕구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키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가능성과 희망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내일 무엇을 해야할까 ?
몸과 정신이 회복 될수록 삶의 중요한 가치들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완전히 고갈된 정신을 가져보니 본질적으로 사람이 지속적으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중요한 가치들이 무엇인지도 배우게 되었다.
내가 일로써 돈을 벌 수 있다면, 이러한 가치들을 최대한 나같은 사람들한테 나누는 일이었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과거의 내가 안타깝다. 너무 당연할 수 있는 것들을 모른채 덜컥 사업체의 대표가 되었고 대책없이 벌렸으며 그러다 무너졌고 회복하는데에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가 만약 딱 한가지를 과거의 나에게 알려줄 수 있다면 무엇을 알려주고 싶을까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있다. 그것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코로나를 조심해 2년도 넘는 시간 지속되니까" "겸손해라" "마음을 놓지 않으면 결코 끝난게 아니다" 등등의 하고 싶은 말들이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혼자 운동해라"
(*함께도 좋지만 처음엔 혼자가 더 좋다. 왜냐면 내면이 무너진 사람은 뭐든 과해지기 때문이다. 무너진 내면을 숨기려 과하게 쾌활한 척하거나, 남과 비교하며 오히려 스스로의 동굴을 더 견고히 만들기 쉽다. 이는 숨길수 없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사람들에게 들통나게 되어있다. 먼저 고독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
운동은 매우 많은 가르침을 준다. 특히 혼자 하는 운동은 나를 발견하게 하고 겸손하게 만든다. 그리고 스스로와 친구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말을 믿게 만들어주고 모든 것이 맘처럼 안풀린날 최소한의 자기효능감을 제공해주며 우울증을 예방하고 미래를 꿈꾸게 만든다. 감정을 다스리게 해주며 문제의 본질을 바라보게 만들고 체력을 키워준다. 분노를 쌓아두거나 엄한 타인에게 해소하지 않게 도와준다.
무너진 사람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지게 해준다.
아직 그 희망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더 잘 살고 싶다"라는 기본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내가 가진 사업적 능력은 무엇일까? 를 고민해 보았을 때 결국 남는 것은 "진정성" 밖에 없다는 사실을 올해 수많은 프로젝트들을 실패하며 깨달았다. 내가 진정성을 가지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는 메세지는 지금 딱 하나 밖에 없다.
"운동해라"
난 아주 오랜 시간을 방황했고, 그로인해 많은 기회를 상실했다.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렸고 여전히 커다란 난관들이 많다. 하지만 계속 살고 있고 다시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캄캄한 동굴 속에 작은 빛이 든 것이다. 그 빛은 스스로 피워낸 빛이기에 더욱 귀하고 소중하다.
구조대는 오지 않는다. 구조대라 생각했던 존재들은 당신을 더욱 외롭고 아프게 만들것이다.
하지만 신은 동굴 속에 갖힌 자들에게 훨씬 멋진 가능성을 담겨두었다.
스스로가 만든 동굴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빛을 비워내는 것 밖에 없는 것.
아무도 나를 구조하러 오지 않는 다는 사실은 사람을 고독하게 만들지만, 스스로 빛을 피워낼 수 있다는 사실은 희망을 가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 시작은 명백하게 "운동"하는 것이다.
제발 말할수만 있다면 나는 과거의 나에게 말하고 싶다.
"운동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