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유 May 04. 2023

 당신이 들어본 적 없는 이름 ‘마거릿 캐번디시'

마거릿 캐번디시가 그린 SF 유토피아


정규교육 과정인 문학 시간에 우리가 배우는 것은 문학과 작가의 역사이다. 이 예술이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변해왔는지 계보를 따라 전통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작가의 계보는 언제나 전통에서 밀려났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꽤나 수고로움이 든다. 그것이 ‘순문학’ 계열이 아니면 말할 것도 없다. 오히려 ‘순수’라는 이름을 지우니 어쩌면 여성들에게도 열려있지 않으려나 싶지만, 세상의 ‘전통’이라는 게 그리 만만치 않다.

한국에서 드문드문 번역본을 구경할 수 있는 영미권에서 조차 주류에 잘 편입시켜 주지 않아서 이들의 계보는 한 명, 그리고 한 명, 한 명. 직접 마인드맵과 같은 거미줄을 치며 더듬더듬 되짚어 나간다.



(어디서는 조안나 러스가 되는) 조애나 러스를 더듬거려 찾아낸 (어디서는 마가렛 카벤디쉬가 되고 어디서는 마가렛 캐븐디쉬가 되는) 이름, 마거릿 캐번디시(Margaret Cavendish)의 (어디서는 빛나는 세계가 되고 어디서는 찬란한 세계가 되는) 《불타는 세계The Blazing World》(2020, 아르테)를 소개한다.



마거릿이 《불타는 세계》를 출간한 것은 1666년이다. 당시는 귀족들의 후원 제도로 귀족과 작가가 개인적으로 연결된 시대에서 점차 대량 인쇄술의 발달로 인하여 전업 작가로 자기 작품을 공적 공간에 먼저 공개하는 시대로 변화하던 시기다. 동시에 여성의 글쓰기란 여성이 자신의 몸을 보이는 것과 같이 ‘글’이 ‘몸’으로 치환되어, 매춘 행위로 읽히던 시대이기도 하다. 글 쓰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직접적인 비난에도, 자신을 스스럼없이 (버지니아 울프의 눈에는 과하게까지) 드러내던 뉴캐슬 공작부인, 그는 ‘미친 마거릿(Mad Madge)’으로 불렸고, 서른세 살에 자서전을 썼고, 여성 최초로 영국왕립학회의 과학실험을 참관하였다. 그에게는 ‘제정신이 아닌, 아는 척하는, 터무니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고, 남성복을 입고 극장에 나타나거나 밑단이 무척 긴 드레스를 입은 채로 등장하기도 하는 등 마거릿 캐번디시는 당시의 자신을 향한 시선을 그만의 방식으로 강화하며 수용하고 있었다.



불타는 세계라 불리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묘



막 근대소설의 형식이 갖춰지기 시작한 무렵의 쓰인 소설이기 때문에 소설이 지닌 플롯과 형식이 현대의 독자에게 (사실은 어쩌면 터무니없게도 여겨지기 때문에) 읽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마거릿 캐번디시가 이 소설을 직접 쓰고 출판했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여자는 글을 쓰면 안 된다’에서 ‘여자가 이런 글을 쓸 수 없다’까지 마거릿은 스스로 글을 썼다는 이유로도, 남자 작가를 시켜 대필을 시켰다는 허무맹랑한 이유로도 온갖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불타는 세계》는 한 남자 상인이 젊은 귀족 여인을 사랑하게 되어서, 그 여인을 납치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낮은 계급의 남자가 마음에 드는 상류층 여인을 납치하며 독자에게 어쩌면 익숙한 로맨스 신화를 기대하게끔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리 쉽게 흐르지 않는다. 갑자기 여인을 납치한 배는 돌풍을 만나 북극을 향해 가고 남자와 선원들은 모두 얼어 죽는다. 한 쪽 안에서, 사랑을 하는 남자와 그를 돕던 선원들은 모두 죽고 그 배에서 살아남은 것은 신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여인뿐이다.


그 배는 여인을 홀로 싣고 “이 세계와 딱 붙어 연결되어 있는 다른 세계의 극지까지 갔”(16쪽)다. 그리고 이 배는 “마침내 어쩔 수 없이 다른 세계로 넘어갔다.”(16쪽) 이 여인은 그렇게 불타는 세계로 간다. 그곳에서 반은 곰이고 반은 인간인 곰인간을 만난다. 그렇게 여우인간, 원숭이인간, 새인간, 파리인간들의 황제를 만나러 가서 그에게 반한 황제와 결혼한다. 황제는 황후에게 “그 세계를 마음대로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는 전권”(24쪽)을 준다. 이 결혼 이후 황제가 이 소설에 등장하게 되는 것은 한참 이후의 일이다. 이 이후로 1부의 대부분의 내용은 황후와 불타는 세계의 반인반수들이 나누는 치열하고도 현대의 과학 상식과 동떨어지기도 한 과학적이며 철학적이고,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주제에 대한 열띤 토론이다. 남자 상인에 의해 납치당한 여인이 홀로 살아남아 새로운 세계의 통치권을 얻어 이 세계가 구성되고 작동되는 방식을 탐구한다.


황후는 자신이 서기를 두어 카발라(입과 귀로 이어진 유대교의 구전, 전통)를 쓰고자 한다. 황후는 영적인 서기를 원하며 처음에는 ‘고대 유명 작가의 영혼’ 즉,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에피쿠로스 같은 사람들을 고른다. “영은 그 유명한 남자들은 매우 박식하고 난해하며 영리한 작가이지만 너무 자기 의견만 고집해서 절대 서기가 될 인내심이 없을 거라고 했다.”(84쪽) 황후는 그렇다면 (당시) 현대 유명 작가인 갈릴레오, 가상디, 데카르트, 홉스, H 모어를 고른다. “영은 그 사람들도 훌륭하고 똑똑한 저자이지만 자부심이 너무 강해서 여성의 서기 역할을 거부할 거라고 답했다.”(84쪽)


그리고 황후가 고른 서기는 마거릿 자신인 ‘뉴캐슬 공작 부인’이다. 이 공작 부인의 영은 황후의 옆에서 플라토닉 연인이 되며 정신적 키스를 하고, 황후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공작 부인은 황후가 지배하는 완벽한 유토피아 세계를 보고는 황후의 세계처럼 “세상의 황후가 되고 싶은 야심이 있고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절대 마음 편히 지낼 수 없다”(88쪽)고 말한다. “무명으로 나태하게 안전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고귀한 업적을 성취하기 위해 모험하다 죽고 싶”(89쪽)다고 공작부인은 말한다. 이는 독자에게 쓴 서문에 담긴 “비록 헨리 5세나 찰스 2세는 될 수 없겠지만, 마거릿 1세는 되고자 애쓰겠다.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처럼 세상을 정복할 힘도, 시간도, 기회도 없지만 한 세상의 지배자로 살지 못하니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냈다.”(11쪽)라는 마거릿의 목적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불타는 세계》 속에서 공작 부인은 황후처럼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미 통치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작 부인이 가야 하는 곳은, 그러니 여성이 자아실현을 위해 갈 수 있는 길은 어디일까? “영들이 계속해서 말했다. 원한다면 스스로 천상의 세계를 창조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90쪽)


나만의 세상. 캐번디시는 그러니 스스로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 목표에 맞는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인간 스스로 만든 비물질적인 세계를 제안한다. “두뇌가 허락하는 한”(90쪽)하여 말이다. 그리하여 황후는 “두 개의 세상, 내 안의 세상과 내 밖에 있는 세상의 주인”(91쪽)이 되기 위하여 떠난다. 공작 부인은 세계의 틀을 잡기 위해 탈레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에피쿠로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홉스 등 당대 유명 철학자들의 의견을 이용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모든 시도 끝에 그가 해낸 방식은 자신이 세계의 틀을 고안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세운 기준에 맞춰 세계를 창조하는 데 성공한 공작부인은 그 안에서 유일한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 결국 밖의 세상과 정면으로 부딪치지 못하고, 그들이 해낸 것은 ‘다른 세계로 넘어가거나’, ‘나의 내면의 세계를 생성해 내는’ 일이 되었다. 실제 세상과 평행우주로 존재하는 불타는 세계의 황후가 통치권을 얻게 된 이유가 황제와의 결혼임을 생각해 보았을 때,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비난을 피해 캐번디시가 소설, 판타지, (시대상을 고려하였을 때 평행우주 유토피아가 등장하며 과학적인 논쟁이 펼쳐지는) SF 장르를 선택한 것은 러스의 의견에 따르면 당연한 듯 보인다.


캐번디시는 남편인 윌리엄 캐번디시와 결혼하면서 데카트르, 홉스 등의 유럽 지성인들과 접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남편의 지지와 노력으로 인하여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배경으로도 당시 시대의 글 쓰는 여성이라는 그에게 붙은 수식어가 그를 ‘정숙’한 여성과 ‘사회적 성공 욕구’를 지닌 여성이라는 사이에서 그의 진의를 간신히 드러냈다 금세 숨기게끔 만든다. 캐번디시는 《불타는 세계》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제도와 절대 군주제를 옹호하지만, 이는 어쩌면 실제 자신이 지닌 급진적인 주장을 당대 남성 중심적 문학계에서 출간되게 하려는 그의 작은 전략일지도 모른다.


보수적 가치라는 외피에 쌓인 그의 급진적인 철학을 찾아가는 행위가, 이해되지 않고, 가끔은 엉뚱한 이야기를 하며, 누군가에겐 소설이 되지도 못하는 문장의 나열뿐일 《불타는 세계》가 2023년에도 사람들에게 읽혀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실제 세상이 아닌 소설 속의 세계를 택한 마거릿 캐번디시와, 내면의 왕국에서 지혜롭게 통치체를 다루는 공작 부인과, 불타는 세계로 넘어가서야 통치 전권을 받아 왕의 자리에 오른 황후는 모두 마거릿의 성공하거나 성공하지 못한 자아상이다. 여성을 끊임없이 ‘정숙’이라는 가치에 욱여넣던 사회상을 파악해내고, 그 세계에서 자신의 성공, 명예 욕구를 성취하기 위하여 캐번디시가 찾아 낸 방식은 “또 다른 세상을 만들기”(140쪽)이었다.


2부에서 황금으로 만든 배를 타고 위험에 처한 자신의 고국을 구한 채 영웅으로 떠나는 황후의 모습을 보며, 캐번디시가 소설 속 장치로 여성영웅서사를 넣을 수밖에 없었는지 떠올린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런 정복자가 되겠다고 마음먹던 어린 시절에서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알렉산드로스의 ‘부인’ 역할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을 시기까지의 걸음은 언뜻 현재의 여성들과도 겹쳐 보이기도 한다.





[원문 링크]

아트인사이트,[Opinion] 당신이 들어본 적 없는 이름 '마거릿 캐번디시(Margaret Cavendish)' [도서/문학]

매거진의 이전글 조애나 러스에게 빚진 새로운 여성 신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