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소설 《여성남자》와 뮤지컬 <해적>으로
왜 오랜 시간 동안 여성 인물은 서사의 주인공으로 이용되지 못했을까. 왜 허구적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등장인물을 다르게 받아들일까? 왜 여성 영웅의 신화는, 남성 영웅이 아버지의 뒤를 따르는 것과는 달리 어머니를 배반하고 나서야 가능한 것일까? 어머니로 대표되는 가정이라는 조력 집단을 버리고 여성은 어디서 처음으로 자신을 지지하는 조력자를 얻어야 할까?
여성을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남성 주인공을 내세울 때는 필요치 않은, 작가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턱 끝까지 차오르는 물음표에 숨이 막혀 결국 포기하게 되는, 답 없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까?
과거의 나는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서 어떤 자료를 뒤져야 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버지니아 울프? 해러웨이? 버틀러? 보부아르? 아니면 여성 작가가 쓴 문학 평론을 읽어야 할까? 마거릿 애트우드? 르 귄? 아니면, 남성 작가가 쓴 문학 평론도 읽어야 할까? 동시대의 논문을 찾아보아야 할까? 찾는 검색어는? ‘여성’, ‘페미니즘’, ‘SF’, ‘비평’ 여러 검색어를 조합하여 논문 사이트를 뒤졌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찾을 수 없었다. 무언가 가슴 속에 얹힌 채로, 나는 질문을 몸속 어디엔가 묻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조애나 러스를 만났을 때, 얹힌 질문이 되살아났다.
조애나 러스는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2020, 포도밭출판사)에서 여성 주인공으로 가능한 플롯(신화)이 제한적이라고 말한다. 여성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쓰려면 사랑 이야기를 쓰거나, 비서사적인 구조의 글을 쓰거나, “한쪽 성에 국한되지 않은 플롯”(215쪽)을 사용해야 한다. 보기는 세 가지뿐이다. 그리고 러스는 이렇게 썼다.
“낡은 신화를 이용하는 한 여자는 쓸 수 없다.”(220쪽)
낡은 신화. 신화는 작가에게 핍진성, 당위성, 인과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신화는 아주 오래전부터 쌓인 정형화된 틀이다. 이미 모두가 응당 그렇다고 알고 있는 절대 부서지지 않는 틀이다.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 때부터 불린 남성 영웅의 노래들,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들, 이어진 남성 중심적인 문학계의 작품들. 낡은 신화의 역사는 신화의 시대만큼이나 오래되었다.
러스는 이어서 이렇게 썼다.
“낡은 신화를 이용하는 한 여자는 쓸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신화라면 어떨까?”(220쪽)
답 없이 물음표만 넘실대던 나의 질문의 답은 모두 하나로 수렴되었다. 여성 주인공을 이해할 새로운 신화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도 수많은 질문이 쏟아진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화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문학적 상상력으로 현재 세계를 편집하고 재창조하는 데 집중하는 장르가 하나 떠오른다. 바로 SF다.
SF는 SF라고 불리는 소설들의 총칭이다.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를 상정한 소설도, 사변 소설도, 남들이 다 SF가 아닌 것 같다고 하지만 작가가 ‘이 소설은 SF입니다’라고 언급하는 소설도, 남들이 다 SF같다고 하지만 작가가 ‘이 소설은 SF가 아닙니다’라고 언급하는 소설도 넓은 의미의 SF소설이다.
셰릴 빈트는 《에스에프 에스프리》(2019, 아르테)에서 “과학소설은 특유의 비유와 모티프의 장르다. …… 우리가 상상적인 비전과 실세계 사이에서 펼쳐지는 변증법적 교류를 탐구하고 성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치적 신화 만들기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다.”(295쪽)라고 SF 소설을 정의했다. 이 정의를 조애나 러스의 ‘여자들의 놀이터’와 연관하여 생각해 보자.
SF는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 다양한 사고 실험이 가능한 세계이다. 그러니 SF소설에서는 현대 시대의 여성과 남성의 권력구조를 반전시키는 일도(나오미 엘더만, 《파워》), 남성의 존재를 지우는 일도(조애나 러스,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지우는 일도(어슐러 K. 르 귄, 《어둠의 왼손》), 여성의 존재가 인간 이하로 폄하되는 나라가 되는 일(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도 가능하다.
가능한 모든 사고 실험을 통해 SF를 여성들의 놀이터로 만든 작품, 조애나 러스의 《여성남자The Female Man》(1975)을 소개한다.
(해당 소설은 한국어 번역판이 정식으로 출간되지 않았으나 조만간 출간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관련 내용은 하단 논문을 참고하였다.
참고1. 김경옥, ‘조안나 러스의 『여성남자』에 나타난 여성 주체의 포스트모던 서사’, 미국소설 27권 3호, 2020.11.
참고2. 장정희, ‘조애나 러스의 『여성 남자』와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신영어영문학 80집, 2021.11.)
《여성남자》에는 동일한 유전적 정보를 지녔으나 각기 다른 평행우주에서 살아 온 J(들)가 나온다. 각각 제닌(Jeannine), 자넷(Janet), 자엘(Jael), 조애나(Joanna)다. 이들은 하나이지만 동시에 다수이다. 러스는 한 여성 인물을 여러 자아로 해체하며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중심 문화가 여성에게 가하는 억압과 그로 인해 구조화된 여성의 모습을 극대화한다.
제닌은 히틀러가 암살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아 미국의 대공황이 해소되지 않은 ‘대체 역사’ 의 우주에 산다. 이 시기의 좋지 못한 경제사정으로 인하여 여성은 경제권을 빼앗긴 채 남성과의 결혼, 임신, 출산만을 꿈꾸게 된다.
자넷은 와일어웨이(Whileaway)라는 여성 유토피아 국가가 존재하는 우주에서 왔다. 전염병으로 인하여 남성들이 모두 사라진 세계라는 설정이 있는 와일어웨이에서 여성들은 ‘난자융합’이라는 새로운 기술로 아이를 낳는다. 자넷은 그런 환경에서 살아온 탓에 다른 J들이 말하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위계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와일어웨이의 여성들은 높은 과학기술로 인하여 힘든 노동에서 해방되었으며, 목가적인 생활을 영위한다. 이 나라에는 전쟁도, 착취도, 폭력도 없다.
자엘은 여성국(Womanland)과 남성국(Manland)의 성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주에서 왔다. 자엘은 전사이며, 킬러이자 여성의 신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이보그다. 자엘의 우주에서 남성국의 남성들은 성적 욕구의 해소와 육아를 맡기기 위해 어린 소년들에게 외과적 수술을 행하여 여성으로 만든다. 여성국의 여성들은 남성을 대체하는 남성 로봇을 만든다. 이러한 자엘의 디스토피아는 자넷의 폭력 없는 목가적 유토피아 와일어웨이와 대비되며 오히려 이분법적으로 나뉜 젠더의 아이러니를 풍자한다.
조애나가 사는 우주는 우리의 (과거의) 현실이다. 저자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조애나는 실제 저자가 소설을 집필한 시기인 1969년, 동시대에 사는 여성학 교수이다. 조애나는 제닌보다는 자유롭고, 자넷보다 억압되고, 자엘보다 통합된 사회에 산다. 사고실험으로 제시한 여러 사회가 비교집단으로 제시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사는 사회를 낯설게 바라보게 된다. 조애나는 자신이 이룰 수 있는 직업적 성취와 사회가 여성에게 부과하는 여성으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다, 스스로 ‘여성 남자(female man)’이라고 선언한다. 조애나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부당성을 인지하고, 자신의 갈등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적인 억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선언한다.
“난 금방, 남자로 변했어. 나, 조애나. 내 말은 물론 여성 남자란 의미야. 내 육체와 영혼은 정확하게 똑같아. 그래서 역시 내가 존재해.”(참고2. 188쪽)
이러한 ‘여성 남자’ 선언은 조애나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자, 이분법적 젠더로 나뉘어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반항이다. 이는 사회를 구성하는 아주 기본적인 약속을 깨는 행위이다. 버틀러는 젠더가 수행적인 개념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조애나가 스스로 ‘여성 남자’임을 선언하였을 때, 그것은 선언을 넘어선 수행이며, 그는 여성 남자를 선언함으로써 여성 남자를 수행하게 되고, 여성 남자를 수행함으로써 그는 여성 남자라는 젠더를 얻는다.
가능한 모든 상황의 멀티버스를 상정한 채 사고 실험을 실행한 러스의 소설을 보면서 젠더를 이용한 사고 실험을 실제로 관찰할 수 있는 현실의 공간이 떠오른다. 그래서 이어 소개할 것은 젠더프리 캐스팅으로 여자 배우와 남자 배우가 각각 여자 역할과 남자 역할을 모두 맡아 연기하는 뮤지컬 〈해적〉이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절찬리에 공연 중인 창작 뮤지컬 〈해적〉은 2인극으로 여자-여자배우, 남자-남자배우 페어로 공연된다. 배우는 2명이지만 역할은 4개이다. 한 명의 배우가 여자 인물인 ‘메리’와 남자 인물인 ‘잭’을, 또 한 명의 배우가 여자 인물인 ‘앤’과 남자 인물인 ‘루이스’를 연기한다. 모든 배우가 모든 성별을 연기하는 것은 낡은 신화와 새로운 신화의 작동방식을 직접 관찰하여 비교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이다.
소설과 같이 허구의 이야기인 극 안 인물의 성별은 미리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값이 된다. 그렇다면 실제로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의 성별은 관객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게 될까? 우리가 가진 신화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 것인가?
뮤지컬 속의 여성 인물인 ‘앤’은 사생아라는 이유로 교회에서 출생신고를 거부당했다. 사생아의 이름은 혼인 서약에만 기록해 준다고 했기 때문에 앤은 자신이 살아있었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 남자와 계약 결혼을 하였고, 목적을 달성한 이후에 해적들이 오는 부두 근처에서 술집을 운영하다 해적선 선장인 ‘잭’과의 내기에서 이겨 해적선에 탑승하기로 한다. 그러나 앤은 남편을 두고 도망쳤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된다. 잭이 재판관에게 형을 집행하는 대신 보석금을 내고 앤을 데려간다고 말하지만, 앤은 왜 자신의 운명을 두고 남자들끼리 돈을 주고받느냐고 분노한다.
우리는 여자 배우가 연기하는 앤과 남자 배우가 연기하는 앤을 관람할 수 있다. 배우들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다. 배우들의 대사도, 소품도, 의상도, 무대도, 조명도, 노래도, 노래 가사도 모두 동일하다. 다른 것이라고는 배우의 성별뿐일 때, 우리의 신화가 기능한다.
무대에 남자 배우가 나서면 남성의 신화가, 무대에 여자 배우가 나서면 여성의 신화가 굳건히 모습을 드러낸다. 남자 배우가 연기하는 앤에게서 ‘분노’가 보인다. 그 분노는 자신의 이름을 기록해 주지 않았고, 자신을 제외한 채 돈을 주고받는 잭과 재판관에 대해서 화가 난 분노이다. 이 추측은 앤의 대사에 등장하는 정보에서 기인한다.
여자 배우가 연기하는 앤에게서도 ‘분노’가 보인다. 그런데, 새로운 신화는 그 안에 조금 더 많은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여자 배우가 연기하는 앤을 보면 이름을 기록해 주지 않는 것 이상으로, 앤이 ‘여성’으로 홀로 겪어왔을 고난이 겹쳐진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언제나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배척당했던 여러 경험이 합쳐져 폭발한 분노. 이름을 기록하지 못한 것 이상으로 더 크고 근본적이지만 여성의 경험이라는 이유로 별것 아닌 것 취급당한 분노. 그렇게 명명되지 못하여 설명할 수 없는 여성들 대부분이 공유하는 경험에서 비롯된 분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틈을 비집고 나온다.
사생아임에도 남성이라는 이유로 높은 지위의 아버지에게 불려 가는 신화와, 본가의 자식임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정 내에서 끊임없이 배척당하는 신화가 무의식적 영역에서 작동한다. 이렇게 고대부터 차곡차곡 쌓인 지층보다 굳건한 신화는 같은 역할, 같은 대사, 같은 의상, 같은 가사임에도 우리에게 다른 인과관계를, 다른 함의를 제공한다. ‘여성 인물’로 겪었을, 노래 가사나 대사에 포함되지 않았을 앤의 이야기를 우리는 ‘새로운 신화’라는 틀을 활용하여 (읽어내고 싶지 않아도) 읽어낼 수 있다.
인물 조형의 관점에서도 그렇다. 뮤지컬 〈해적〉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 ‘잭, 루이스’에게는 성별로 인한 특별한 서사가 포함되지 않지만, 여성 인물이 ‘앤, 메리’의 캐릭터가 지닌 서사에서는 여성이라는 특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앤은 남편의 고발로 인해 재판에 회부되어 죽음을 가장하고서야 벗어나고 남자 이름을 사용하고 남장을 한 채 해적선에 탑승하고, 메리는 유산을 위하여 죽은 오빠인 척 남장을 하고 해적으로 살아간다. 앤과 메리에게서 ‘여성임’을 지우면, 인물들의 서사는 대부분 사라진다. 그러나 잭과 루이스에게 남성(Man)이라는 특성은, 인간(hu-Man)이라는 특성과 같다. 이렇게 비교집단이 존재할 때, 우리는 굳건한 신화의 작동방식, 즉 남성은 인간이고, 여성은 여성이라는 낡은 신화를 잘 읽어낼 수 있다.
내 신화는 조애나 러스에게서 시작한다. 조애나 러스의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2021, 낮은산)에 서문을 쓴 작가 제사 크리스핀은 “이 책이 당신이 가진 세계관을 강화시키지 않기를, 당신이 생각하기를 멈추는 데 사용되지 않기를 바란다”(35쪽)고 말했다. “우리는 러스에게 그보다는 훨씬 큰 신세를 지고 있”(35쪽)기에 우리는 여기서부터 시작해야한다고 말이다. 이 글을 시작으로 앞으로 가야 한다. 러스의 글을 읽고 난 독자는 동의와 공감에서 끝낼 수 없다. 시각을 확장하고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내고, 새로운 신화를 유통하고 강화해야 한다. 부지런히 우리의 지층을 쌓아야 한다. 우리는 그만큼, 혹은 그보다는 더 러스에게 빚지고 있기 때문에, 또 크리스핀에 따르면 우리 모두 러스의 딸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러스를 만나면 묻고 싶은 것들을 생각한다.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 이후에 출간되는 한국SF 여성서사 소설들에 대한 생각, ‘여성서사’라는 단어에 부과된 새로운 여성 신화를 해방과 억압 중 어느 영역으로 보아야 할지에 대한 의견,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소설들의 플롯이 ‘다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라는 말에 대한 견해, 젠더프리 캐스팅으로 SF소설 속에서만 가능하던 사고실험이 가능하게 된 뮤지컬로 얻을 수 있는 지점들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여 질문 속에 파묻혀 질식하던 시절은 지나 보냈다. 나는 전보다 앞으로 나아갔지만 그럼에도 멈출 수 없다. 계속해서 새로운 신화를 발굴하고 재조명하고, 시끄럽게 떠들고 생각하고 쓴다. 조애나 러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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