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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복

행복하고 즐거운 회사생활

by Ubermensch





나는 참 상사복이 많은 사람이다. 무턱대고 아무 사람이나 마냥 따르고 좋아하는 강아지 같은 타입이 결코 아님에도, 10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스무 명 정도의 과장님, 사무관님, 검사님 밑에서 일을 했고 그 휘하에서 대부분 존중과 보호를 받으며 행복하고 자유롭게 일했다. 옛날 영화나 드라마에서 검사는 권위적이고 계장을 하대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표현되지만 적어도 내가 본 검사님들 중에서 그런 분은 단 한 분도 없었다.


운 좋게 제안을 받고 비정기 인사로 상급 기관에 가게 됐을 때, 못 보낸다며 붙잡으시더니 결국 나 혼자만을 위한 전출식을 열어주시고 그 부서에서 고작 3개월 근무했는데 재직기념패까지 만들어준 과장님도 계셨고. 또 다른 과장님은 업무적으로 문제가 생겨 징계 위기에 처했을 때 이 직원이 평소 얼마나 성실하고 유능하게 일해왔으며 문제가 발생한 원인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보고서를 작성해 검사장님께 직접 찾아가 변호해 주셔서 나는 아무런 문책을 당하지 않았다. 감사기간 지적 위기 때는 법전과 규정을 뒤져 책임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직접 밝혀 구제해 주신 과장님도 계셨다. 내 일이 너무 많다고 어차피 결재만 하느라 심심하니 내 단위업무 중 하나를 직접 해주시겠다고 하신 과장님도 있다. 보통 조부모상까지 회사에서 챙기지 않는데, 우리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내 눈물을 본 당시 과장님은 직원들을 이끌고 먼 지방의 장례식장까지 조문을 와주셨다. 어떤 검사님은 숙취에 시달리는 나를 위해 직접 꿀물을 타서 숙취해소제와 함께 자리에 가져다주셨고, 어떤 검사님은 내가 좋아하는 시나모롤 캐릭터 소품, 머그컵, 화장품, 핫팩 등등을 별 이유도 없이 수시로 선물해 주셨다. 또 다른 검사님은 불안한 내가 안고 잘 수 있게 한밤 중 생일 선물로 꿀잠 인형을 보내주셨다.


지금 모시는 부장님은 아침에 나보다 먼저 출근하셔서 내 자리 옆에 서서 나를 반겨주시고, 내가 자리에 앉으면 직접 내린 커피를 내 머그컵에 부어주신다. 오늘 점심에는 어디서 정보를 얻으신 건지 폐업예정이라 할인을 한다는 약국에 데려가서 영양제, 진경제, 진통제, 목 스프레이 같은걸 잔뜩 사주셨다. 수사보고를 완성하면 귀찮게 부장님께 보고하러 갈 필요가 없이 자리에 앉아 부장님을 부르면 부장님이 다 썼어? 하면서 도장 찍어줘야지. 하면서 몸소 내 자리로 찾아오신다.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으시고 나를 믿고 바로 결재해 주신다. 우리 사무실에는 하루에도 열 번은 박장대소가 터지고 세 시간 정도 대화가 꽃핀다. 거의 일 얘기인데도 재밌어 죽겠다.


검찰청에 성격이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고, 내가 모두에게 사랑받는 슈퍼 엘리트 초능력자이거나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는 싹싹하고 좋은 성격도 확실히 아니다. 늦잠을 자서 지각도 자주 하고, 할 말도 다 하고, 아재개그는 못 들은 척하거나 정색을 하고, 오늘은 컨디션이 나빠서 업무를 태만히 하겠습니다, 하는 식의 뻔뻔한 선포도 한다. 때로는 이건 좀 갑질 아닌가요 따지기도 한다. 기분이 좋고 나쁜 건 얼굴에 티를 팍팍 내고 다닌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다 오냐오냐 품어주시는 다정하고 자상한 상사만 만났다.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술이나 밥을 사 먹이고, 위로와 조언을 아끼지 않고, 동생이나 조카나 자식처럼 옆에 끼고 키워주셨다. 업무든 인생이든 뭐든 어른으로서, 상급자로서, 전문가로서 가진 지식과 노하우를 아낌없이 알려주셨다. 항상 둥기둥기만 받아온 것은 아니고 내 되바라진 성격이나 디테일이 부족한 단점으로 혼날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 꾸중이나 잔소리가 애정에 기반한 것과 내 잘못인 것을 알아서 혼이 나도 아무렇지도 않다. 그리고 혼날 땐 꼭 대든다. 그래서 더 혼나기도 하지만.


그래서 나는 우리 회사에 대한 애착이 정말 크다. 스물여섯 살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부터 나를 보호해 주고 돌봐주고 길러준 곳이다. 성인이 되고 들어간 회사인데, 그로부터도 정말 많이 자랐다. 항상 좋은 분들을 만났다. 그분들의 모든 말 한마디, 배려, 이해, 따뜻한 마음에 수시로 감동이 차올라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곤 했다. 그래서 내가 매 인사이동 때마다 펑펑 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운이 엄청나게 좋아서 10년 내내 어느 부서에 가든 항상 천상계 인품을 가진 완벽한 상사만 만난 것은 아닐 거다. 내게 최고의 상사였던 그분들도 누군가에겐 까다롭고 어렵고 힘든 상사일 수 있다. 고소한 정수리를 포함한 회사 남자 수사관들은 내가 예쁘고 귀여워서 특별 대우를 받는 거라고, 본인들이 나처럼 행동하면 얻어터지거나 해고를 당할 거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나는 늘 사람의 좋은 면을 우선해서 본다. 나보다 경험과 지식이 많은 사람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른다. 누구에게나 나보다 나은 점, 배울 점이 있다. 하물며 내 윗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일을 일로 생각하지 않고 배움의 기회나 경험이라고 생각하면 전혀 안 힘들고 즐겁다. 하나의 과업을 해낼 때마다 하나의 경험이 더 쌓인 유능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나는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도 기꺼이 맡고, 어떤 업무를 하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배우고자 한다. 모르면 물어보고 찾아본다. 실수하면 바로 인정하고 다음부터 조심하겠습니다, 한다. 그런 태도로 회사를 다니면 상사로서는 뭐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챙겨주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귀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나를 가르쳐주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구체적으로 자주 표현한다. 그 마음이 그분들께 순수하게 전해지기 때문에 예쁨을 받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고소한 정수리 등 말대로 단순히 내가 예쁘고 귀여워서일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거다.


우리는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낸다. 사람들은 회사를 그냥 돈 버는 곳으로 생각하고 의미를 두지 말라고 하거나, 가능하기만 하면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 한다. 하지만 회사도 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 따라, 그리고 어떤 관계를 만들어가느냐에 따라 내가 속한 곳은 천국이 될 수도 지옥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기왕 다니는 회사를 나는 즐겁게 다닌다. 그렇게 사랑하는 회사가 곧 망해서 몹시 속상하지만, 그래도 망하기 전까지는, 내가 속해있는 자리에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내일도 모레도 내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낼 것이다. 우리 최고의 부장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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