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증 지옥 2

부장님과 나

by Ubermensch







3년 치 영수증 수천 장 무더기 중 증거로 쓸만한 것들을 골라내는 작업 몇 주를 한 이후 며칠 간 스캔 작업에 돌입했다. 어제 야근을 하며 마침내 다 했다고 여겼다. 오늘은 스캔한 파일을 하나하나 클릭해서 프린터에 불이 나도록 출력을 하며 고소인 측이 자기 나름대로 꾸려 보낸 범죄일람표와 대조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 영수증과 일람표상 일치하지 않는 내역들이 다수 발견되었고, 스캔이 제대로 안 돼서 방향이 어긋난 것도 많았으며 스캔 자체가 누락된 것도 다수 발견된 것이었다. 어제로써 탈출한 줄 알았던 영수증 지옥은 다시 내게 덮쳐왔다. 나는 하루 종일 똥 씹은 얼굴로 영수증과 스캔파일과 출력물과 범죄일람표를 대조하며 검은 오로라를 풍겨내고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에 드나들듯 수시로 내 등 뒤로 난 문을 열고 물을 뜨러 오시거나 간식 창고로 향하시는 부장님과 눈이 마주치면 생긋 미소를 지어드리던 평소와 달리, 검은 기운만 잔뜩 내뿜고 있는 나를 부장님은 힐긋 살펴보고 들어가셨다. 같은 사무실을 공유하는 실무관님과 앞자리 계장님은 절대 야근을 하는 일이 없으시고 조퇴나 칼퇴를 하시기 때문에 나만 근무시간이 지나서까지 그 무더기들과 함께 연휴를 앞두고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등 뒤로 부장님이 빼꼼 문을 여시고서는 영수증 때문에 고생이 많아. 밥은? 시스템 문제로 초과근무 지정이 안 된대요. 집에 가서 먹으려고요.


나는 여전히 음울한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저는 단순노무가 너무 싫어요. 기록을 보고 싶다고요. 구속사건 피의자 100명을 조사하는 게 낫겠어요. 영수증 노예로 몇 주간 살다 보니 창문에 머리를 꿍꿍 찧고 싶습니다. 창밖으로 영수증을 던져버리고 싶어요. 사실 부장님께 박스를 들고 가서 마구 흩뿌리는 상상도 해봤습니다. 부장님은 내가 창문에 머리를 막 찧고 싶다는 부분부터 흠칫하시더니, 우리 나가서 초밥 먹을까? 초밥은 금방 먹고 올 수 있을 거야. 하셨다. 평소 두 검사실이 함께 먹는 방 점심은 앞자리 계장님께서 날것을 못 드시기 때문에 회나 초밥은 항상 피했다. 나는 날 음식을 가장 좋아한다. 딱히 입맛은 없지만 부장님께서 굳이 제안을 하시는데 싫다고 할 수 없으므로 그러기로 했다.


점심도 아니고 사무실에서 배달을 시켜 먹는 것도 아니고 구내식당도 아니고 까마득히 높은 부장검사님과 둘이 음식점까지 걸어가서 초밥을 먹는다고 상상하니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내가 분위기를 잘 띄우고 상사 비위를 잘 맞추는 부하직원 스타일도 아니고 부장님께서도 말씀이 많으신 편은 아니기 때문에 어색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걸어가며 사건 이야기 영수증 이야기 공소청과 중수청 이야기 등을 하며 식사를 했다. 부장님은 내게 안쪽 자리를 양보해 주셨다.


문득 나는 부장님의 보풀이 핀 군밤장수처럼 보이는 목도리를 보고 말씀드렸다. 부장님 다음 겨울에는 그 목도리 하지 마시고 새로 사시면 안 될까요? 부장검사님처럼 보이는 목도리로요. 이거 몇 년 전에 다이소에서 3천 원 주고 산 거야. 디자인은 백화점이랑 똑같다고. 부장님은 운동화 밑창도 다 떨어진 것을 본드로 붙여서 신고 다니신다. 그리고 운동화도 하나 새로 사시면 안 돼요? 나는 한평생 나이키 운동화를 신어 본 적이 없어.


부장님이 저녁에는 커피를 안 먹냐고 물어보시기에 사주시면 먹는다고 대답했다. 아유 참. 안 사주려고 했는데. 스타벅스에 가자고 하셨다. 부장님은 인근 스타벅스 두 곳 중 더 가까운 곳을 고민하시다 한 곳을 정하셨는데 막상 걷다 보니 선택한 곳이 더 먼 것 같았다. 상사의 기분을 맞출 노력을 굳이 하지 않는 나는 이쪽이 더 먼 것 같다는 감상을 떠오르는 대로 꾸밈없이 털어놓았다. 배가 빵빵 부른 채 나른하게 털신을 질질 끌며 걷고 있던 내게 부장님이 느닷없이 말씀하셨다.


이렇게 생각해 봐. 우리가 걷는 여기가 서울이 아니라 스페인의 밤거리라고. 저 교회는 그냥 교회가 아니라 발렌시아 대성당인 거야. 어때. 그렇게 생각하면 먼 거리를 걷는 것도 우울하지 않아. 부장님 말씀대로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며 상상력을 발휘하니 밤 풍경이 제법 근사하게 보이기도 하고 왠지 재미있어져서 웃음이 풉 하고 터졌다. 정말로 스페인의 밤거리를 걸으며 발렌시아 대성당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스페인에 가본 적도 없고 발렌시아 대성당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커피를 포장해 갈 줄 알았는데 부장님께서 마시고 가자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을 더 보냈다. 나는 석별의 정에서 석이 무슨 한자인지 궁금해했고, 부장님은 ISA계좌를 만들어서 맥쿼리인프라 주식을 사라고 권해주셨다. 나는 몇 년 후 마흔 살이 되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고 부장님은 탐크루즈는 예순 살이라고 대답해 주셨다. 굳이 스타벅스에 온 이유는 부장님 대학생 따님의 코 묻은 기프트카드를 빼앗아 왔는데, 묻어있는 코만 닦으면 쓸 수 있는 거라고 했다.


부장님의 3천 원짜리 다이소 목도리와 나이키가 아닌 헌 운동화, 그리고 우리 사이사이 침묵과 어색함이 섞인 아무 주제 대잔치 대화가 썩 나쁘지 않아서, 이 직장의 온도를 조금 더 누리고 싶어졌다. 춥지 않은 밤이다. 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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