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병

바람에 실려오는

by Ubermensch







머리카락이 너무 자라 엉덩이에 닿을 지경이다. 지난 여름 이후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더니 라푼젤이 된 것 같다. 겨우내 쓰레기집에 들어앉아 머리카락만 기르고 있었으니 신세가 라푼젤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창밖으로 본 세상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깜깜해보여서 굳이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해가 길어진 것 같아 문득 창문을 열어보니 공기의 질감이 달라졌다. 계절병이 도지려고 한다.


가장 심각한 계절병은 본래 늦가을에 발병한다. 그 무렵이면 살아오면서 겪었던 온갖 서러운 일들이 돌풍처럼 밀어닥쳐 견디기 무척 힘들다. 하루하루 더 차가워지는 칼바람은 내 속살을 베어버리고 그 날카로운 고통에 나는 어쩔 줄을 몰라 웅크리곤 한다. 나는 해가 짧아지는 초겨울을 무서워한다.


봄 계절병은 양상이 조금 다르다. 가을 계절병과 반대로 살면서 겪은 온갖 따스하고 행복했던 일들이 연분홍 벚꽃잎처럼 흩날려 견디기 무척 힘들다. 화사한 햇살이 내리쬐는 배경에, 무방비하게 커다랗게 웃어버리던 순간들이 마치 제 3자의 영상처럼 재생된다. 그렇게 나를 웃게 해 준 사람의 얼굴도, 내 웃는 얼굴을 바라보는 다정한 눈동자도 클로즈업된다. 행복한 시절의 추억은 이내 슬픔을 동반하며 침잠한다. 이미 지난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형이 아니므로 추억이다.


사시사철 풍경이 아름다운 청사에 근무했던 시절이 있었다. 인근에 계곡이 흐르고 뒤편엔 커다란 산이 있고 꽃과 나무가 가득하고 새와 곤충과 청설모까지 보이는 곳이었다. 회사에 함께 다니던 동기는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경에 매번 감탄을 하며 어느 날 내게 왜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감상을 말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벚꽃이, 단풍이, 설경이 예쁘다는 생각이 안 드냐고 물어봤다. 그런 감정이 안 드는 거냐고.


든다. 감정도 감상도. 단지 발화가 쉽지 않을 뿐이다. 서있는 계절의 한 순간 내가 감각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쉽게 나눌 수 없을 뿐이다. 피부에 닿는 계절 공기의 온도, 습도, 타격감, 내 눈에 담기는 세상과 귀에 들리는 소리가 유사한 과거의 어느 한 때로 나를 데려가버린다. 그리고 그 순간의 나를 지배한다. 당시와 동일한 상태, 사람, 상황, 감정의 무대에 나를 다시 세운다. 그러므로 단편적인 아, 벚꽃 정말 예쁘다. 이 한 문장으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별 말을 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무심하고 무감한 사람으로 남는다.


병 때문에 그렇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의학계에 정식으로 등록된 병명은 아니고 내가 지어낸 병명이다. 계절병. 바람이 분다. 곧 분홍 벚꽃잎도 날리겠지. 그러면 나는 또 견디기 힘들어질테고. 잘못 타고난 것들이 편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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