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구석

비빌 언덕

by Ubermensch






10년 전 내 밑으로 첫 후배가 들어왔다. 지명수배된 벌금 미납자들의 전화를 하루에 백통씩 받는 생활을 수개월 간 이어가던 나날이었다. 사무실 공용 전화기가 따르릉 하고 울리면 안 되었고, 전화기에 손을 올려두고 있다가 '따르릉'에서 'ㄸ'에 맞추어 전화를 당겨 받아야 했다. 전화를 받으면 니년 목을 따러 가겠다, 불을 지르러 가겠다, 뭔 년 뭔 년, 상담사가 왜 이렇게 불친절하냐, 로봇이냐, 벌금 낼 돈 없는데 나보고 죽으란 소리냐 등등 각종 험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엔 엎드려 울었다. 나중엔 진짜 로봇이 되고 말았다. 하루 종일 전화만 받다가 내 본연의 업무는 야근을 하면서 비로소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부서는 밑으로 후배 3명은 들어와야 숨을 쉬고 살 수 있는 부서였다.


그래서 처음 받은 후배들이 얼마나 귀중했는지 모른다.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선물도 사줬다. 물론 후배가 두 명밖에 없어서 나와 내 동기는 여전히 전화받이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나누어 받는 사람들이 생겼으니 한결 나았다. 우리 회사는 승진을 하거나, 한 청에 몇 년 근무를 하면 무조건 다른 청으로 전보를 떠나야 한다. 그렇게 각자 여기저기 떠돌다 10년 전 내 밑에서 수습을 하던 후배를 같은 청에서 다시 만났고, 이번 인사로 승진한 후배는 나와 같은 층 다른 검사실 계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나는 3년 전 계장 직급을 달고 운 좋게 훌륭한 멘토 검사님들을 만나서, 마치 아기새가 엄마새에게 먹이를 받아먹듯, 유치원생이 한글을 배우듯 수사를 배울 수 있었다. 지금 부서에서는 나보다 10년쯤 선배이신 앞자리 계장님과 우리 부장님이 상냥하게 지도해주셨다.


하지만 내 경우는 몹시 운이 좋은 특이 케이스고 보통은 갓 검사실에 가면 알아서 1인분의 역할을 해야 한다. 선배든 동기든 여기저기서 매뉴얼을 찾아보든 깨지면서 배우든 각자도생을 한다. 후배는 걱정이 많았다. 나는 후배를 옆에 앉혀놓고 몇 시간 동안 내가 그동안 전수받고 경험한 요령과 자료를 넘겨주고 이것저것 나름대로 설명을 해줬다. 나도 여전히 부족하고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알고 있는 건 전부 알려줬다.


엊그제 처음 검사실에 간 후배와 점심을 먹었다. 막상 가보니 함께 있는 선임 계장님도 검사님도 아무런 말이 없으시고 본인의 수사경력이 전무한 것을 아무도 고려해주지 않은 채 일을 주셨다고 했다. 내가 시스템 사용법부터 미리 이것저것 알려주지 않았다면 정말 막막하고 깜깜했을 것 같다고 했다. 이번주 내내 하루 종일 삐약거리는 메신저가 온다. 너무 뿅아리 같은 질문이라 나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지어진 모습을 보고 부장님이 왜 웃냐고 하셨다. 나는 후배가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갓 승진한 계장이 검사실에 가서 예쁨받을 수 있는지 부장님께도 여쭤보니 알아서해야지, 하셨다.


후배는 이미 감사의 표시로 내가 못 먹어본 두쫀쿠와 필로우 향수를 선물해 줬는데, 어제는 또 찾아와 곰돌이 디퓨저를 선물로 내밀었다. 정말 귀엽길래 마음에 쏙 들어서 책상 눈에 띄는 곳에 올려두었다. 부장님이 이건 뭐냐고 물어보셨다. 아 디퓨저인데 후배가 선물로 준거예요. 아유 뭘 이런 걸 다, 자연스럽게 곰돌이 디퓨저를 들고 집무실로 향하시는 부장님께 제 거라고 소리를 빽 지르며 막아섰다.


오늘은 처음으로 내가 수사한 사건의 압수물을 직접 수리하는 절차를 거쳤고, 양 당사자간 합의 기회를 주는 형사 조정 회부 절차를 해봤다. 그 과정에서 여전히 누군가에게 찾아가 계속해서 묻고 배운다. 아직도 안 해본 게, 배울 게 정말 많다. 귀중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나를 키워주신 분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후배에게 말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제가 아는 건 전부 알려드릴 수 있어요. 제가 믿을 구석 비빌 언덕 해드릴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잘하실 거예요. 하고. 후배는 눈물이 난다고 했다. 나도 지금껏 내 믿을 구석과 비빌 언덕이 되어주셨던 분들을 떠올리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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