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sf소설이라고 하면 테드창의 소설정도밖에 몰랐던 나에게 새로운 장르에 눈을 뜨게 해준 책. 앞으로 숨어있는 김초엽 작가의 단편들, 그리고 유명한 sf소설을 틈틈이 찾아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찌보면 sf에서는 뻔할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 새로운 전개를 해나간다는 점과 그러한 공상과학 이야기 속에 현실의 문제들을 녹여낸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또 주인공들이 거의 대부분 여성이라 내내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고, 사회가 주입하는 여성의 모습이 아닌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여성 캐릭터들이어서 더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난 뭔가에 도전해보는 것을 좋아해서, '모험'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모험하는 여성의 서사는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무언가에 도전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모험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로 가득찬 책이라는 점에서부터 이미 마음에 든 책이었다. 사실 다른 소설에 비해 엄청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거나 무겁고 깊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느껴지지만 포항공대 석사를 마친 과학도 여성작가의, 여성 주인공에 의한 sf 스토리라는 점과 사람들이 어려워할 수 있는 sf이야기를 쉽고 매력적으로 풀어낸 점 그리고 사회 문제 의식을 반영해냈다는 점이 인상깊다.
상을 받았다는 '관내분실'도 좋았지만 난 '감정의 물성'과 '공생가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공생가설은 언제나 궁금해 하던 이야기, 왜 일정 나이가 지나면 어릴 때의 기억을 잊어버릴까? 그리고 내 안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는 무엇이었을까? 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재자체도 굉장히 특이했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굉장히 아름다웠던 단편이었다. 너무 좋아서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올 정도였다. 감정의 물성은 평소 나의 가치관이 소설로 풀어진 것 같은 단편이라 주관적으로 혼자 마음에 들어한 단편이다. 4차 산업혁명이니 코딩이니 하는 시대에 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둘 다 경험해본 90년대생이라 그런지 아직까지는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편이다. 모순적이게도 아이패드, 이북리더기 등등 가질 수 있는 전자기기들을 다 갖추고 있으나 결국엔 종이책을 펼쳐들거나 극장까지 걸어가고야 마는 사람인 것이다. 아무래도 난 아직까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 편하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은 금방 사라져버리거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런 나는 예전부터 '물성'을 중요하게 여겨왔다. 어플로 일기를 쓰거나, 이북으로 책을 구매하거나, 음악 스트리밍을 하는 것보다는 직접 내 손으로 연필을 집어 일기장에 일기를 쓰거나, 굳이 도서관을 찾아가서 종이책을 빌려와 한 장씩 읽으며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보거나,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사서 꽂아두기만 하면서 혼자 흡족한 미소를 짓는 편을 선호하는 것이다. 때문에 지구와 타 행성을 건너다니는 미래를 그린 이 sf소설집에서 물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조금은 아날로그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이 단편에서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비누라든지 초콜렛같이 물성이 있는 형태로 보관하여 그것을 사용할 때마다 그 감정이 느껴질 수 있게 하는 '이모셔널 솔리드'의 물건이 등장함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 걸 도대체 왜 사냐는 정하의 말에 동료는 이렇게 말한다.
“물성이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사람을 사로잡아요.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한 거죠. ...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물성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게 의외로 매력적인 셀링 포인트거든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변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다는 것,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물성의 중요한 요소라는 것에 공감했다. 그러나 정하는 기쁨이나 행복, 안정감이 아닌 우울, 공포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담은 물건을 굳이 사는 보현을 이해할 수 없어한다. 보현은 그런 정하에게 말한다.
“물론 모르겠지, 정하야, 너는 이 속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 어떤 문제들은 피할 수가 없어. 고체보다는 기체에 가깝지. 무정형의 공기 속에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짓눌려. 나는 감정에 통제받는 존재일까? 아니면 지배하는 존재일까?”
나도 정하처럼 이 속에 살아본 적 없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면 이 말에 공감하지 못 했을 것이다. 우울해보기 전엔 나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었으니. 그러나 내 우울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건지 그 원인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우울과 한시적인 행복만이 계속해서 반복될 때 나도 보현처럼 차라리 내 우울의 형태가 제대로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울의 가장 힘들었던 점은 그 불명확함에 있었다. 어떻게 해야 나아지고 벗어나게 될지, 언제부터 무엇때문에 이 속에 갇혔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 더 답답했다. 그리고 그 우울에서 벗어났던 것도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사람들이 우울체를 구매했던 이유도 그 답답함, 불명확함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감정을 굳이 아날로그적인 물건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미래적인 것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든다. 아무튼, 다음에 또 우울이 찾아온다면 우울한 사람이 행복한 감정을 지닌 행복체를 만지듯이, 엄청나게 따뜻한 색감으로 그려진 미래가 표지를 장식하는 이 책을 꺼내 만져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