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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다혜 Mar 15. 2020

의미있는 패스들  

책 <이만큼 가까이>


최근 정세랑 작가님에 빠져 그의 작품들을 도장깨기하고 있다. 매 번 통통 튀는 이야기들을 읽다 파주를 배경으로 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마주하니 초반엔 작가님의 작품들과 다른 결을 가지고 있나 생각했지만, 책을 덮은 후에는 역시 정세랑 작가님의 작품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지금 내 상황에 읽기 적합했던 책이라는생각이 들었다. 주인공들의 십대부터 삼십대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친구들이 함께, 때론 떨어져서 각자의 결핍과 상실, 행복을 마주하는 법을 보여준다. 아무래도 이 주인공들이 살아낸 십대에서 삼십대까지의 삶이 나의 삶과도 어느정도 겹쳐있어 나에게 더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주인공들이 엠피쓰리에 스무 곡 남짓의 음악을 넣어 버스에서 듣고, 비디어를 밀어 넣어 영화를 보던 장면들을 보면 꼭 내 어린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주완과 함께 매주 히치콕 주간, 구로사와 아키로주간, 핑구주간과 같이 테마를 정해 함께 영화를 보는 주인공에게는 부러움마저 느껴졌다. 주인공은 계속해서 친구들과의 만남을 기록하고, 그 기록들을 영상으로 만든다. 아직 삼십대는 아니지만 저 멀리 삼십대를 바라보고 있는 나는 주인공과 함께 괜시리 지난 시간들을 떠올려본다. 스쳐 지나간 친구들부터 아직 내 곁에 남아 있는 친구들까지.


"우리는 그렇게 모여서 함께 망가지고 고장나고 그러다 한사람씩 사라질 것을 예감했으나 이른 포기의 달콤함 같은 것이 깃들어 있어서 그리 무거워지진 않았다. "

어느 순간부터 눈 앞에서 사라진 친구들부터 점점 고장나고 망가져 가는 것이 보이는 친구들, 그리고 그게 보이지 않는 친구들까지. 주변 사람들과 함께 세월을 보낸다는 건 그런건가 생각했다. 최근 그 사실에 대해서, 그리고 예전처럼 그저 밝고 명랑하던 우리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금 슬프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했지만 이 문장처럼 이른 포기의 달콤함을 느껴보자고 생각했다.


"내 생각에, 별로 좋은 나이라는 건 없는 것 같아. 어릴 때는 언제 어디에 있고 싶어도 결정권이 없고, 나이가 들면 지금이 언제인지 어디에 있는지 파악을 못하니까."

또 요즘엔 취준생활+코로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일상에 아무런 이벤트가 없는 채로 그저 '살아있기'만 하다보니 다양한 색으로 가득찼던 과거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 당시엔 딱히 좋다고 생각 안 해봤지만 지금와서 보니 좋은 시절이었던 시간들. 당시엔 결정권이 없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좋지 않았고 지금은 내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몰라서 좋지 않으나 이 모든 시간들도 정말 먼 훗날 보면 다 좋았던 시절이려나 생각한다. 아니면 저 대사처럼 별로 좋은 나이라는 건 없는걸까.


"사람들은 '나 언젠가 이 순간을 그리워하게 될 거야' 하고 일찍 예감한 것 같은 표정들을 지었다. 현재를 살면서 아직 오지 않은 그리움을 먼저 아는 종자들이 특이하게 느껴졌지만, 내 주변엔 그런 이들이 많았다."

저 대사는 내가 실제로 내 뱉었던 말이라서 조금 소름돋았다.. 작가와 그의 팬은 같은 결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역시 정세랑 작가님과 나도 같은 결을 가지고 있는걸까 생각했다. 난 실제로 좋은 순간에 '아, 언젠가 분명 이 순간을 그리워하게 될거야'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아마 평소에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많이 느껴서 좋은 순간에도 지금을 그리워할 미래의 나를 걱정하는 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의미없는 패스는 없대. 줄창 하다보면 분명 뭔가로 연결되는 거야. 놓치거나 떨구지 말고 하다보면 하는 사람도 모르게 뭐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의미 없는 패스는 없다고."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주인공들이 십대를 거쳐 삼십대까지 거쳐 점점 성장해나가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각자가 살아가는 인생은 의도치 않았던 일이 기회를 만들기도 하고, 선의와 우연이 겹쳐 죽음을 불러오기도 하면서 진행된다. 한 인생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들은 그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의 인생을 또 바꿔가면서 이 세계를 움직이는 것 같다. 나도 언제나 예상하지 못 하고 그냥 했던 일들이 좋은 기회로 이어질 때, 이런 길로 가야지 의도하고 했던 일들이 전혀 쓸모없어질 때, 노래 가사에 나오는 인생의 '잘 짜여진 장난'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이 대사가 좋았다. 계속해서 하다보면 분명 뭔가로 연결된다는 것. 지금은 내 눈앞에 아무런 결과물도 없지만 지금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하고, 그 결과물들을 연결, 연결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야겠다. 그러다보면 아무것도 아닌 순간이라고 여겼던 일들이 모여 나도 모르게 뭔가 되어있지 않을까. 아무것도 모르던 십대시절 최초로 하던 일들을 결국엔 직업으로 살려서 하게 되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언젠가 나도 그냥 잘 해왔던 일들을 살려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도장이 아홉개라는 건 한번만 더 찍으면 보너스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 생각을 하니까 괜찮았어요."

그런 소설이 주는 위로와 더불어 작가님이 공모전 최종심에서 아홉번이나 떨어졌을 때 하셨다는 말씀이 위로가 되었다. 난 지난 하반기 대기업 최종면접에서 탈락했을 때 단 한 번의 최종탈이었는데도 그렇게 힘들어했는데 무려 아홉 번이라니, 게다가 그런 실패를 이렇게 뒤집어 생각하다니 책의 끝까지 와서 작가님을 더 사랑하게 됐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지 모를 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어디로 이어지게 될 지 알 수 없을 때 읽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들의 성장과 더불어 인생의 전체적인 지도를 본 느낌이 들었다. 지금 당장 마주한 고통보다는 인생 전체를 보았을 때 그 고통이 인생에 미칠 파장같은 것들 말이다. 당장 얻어야 할 것에만 집중하던, 나무만 보던 나같은 사람에게 숲을 보게 해주며 인생은 원래 다 그런거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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