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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다혜 Mar 24. 2020

미지근해진 마음

책 <일의 기쁨과 슬픔>


대학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던 작년 하반기의 나는 독기가 오를 만큼 올라있었다. 장장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대학생활을 하며 때론 내 꿈을 따르며, 때론 현실의 취업조건을 따르며 남들이 한다는 스펙은 모두 쌓아놓았다. 그리고 드디어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다시 대학생활을 하라고 한대도 지난 내 궤적 그대로 밟고 싶을 만큼 후회 없고 알차게 보냈다고 자신했는데, 결과는 끝없는 서류 탈락이었다. 간신히 서류 합격을 한 대기업은 무슨 검증을 그렇게 해대는지 총 여섯 번의 면접을 세 번이나 본사로 불러가며 봤었고, 최종면접이라는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탈락하는 바람에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알게 되었다. 

하필 내 시대에 취업이 힘들어졌다는 불운, 스펙이 출중한 지원자들에게 나이나 공백기 같은 별거 아닌 조건들을 붙잡고 늘어지며 인신공격을 해대는 매너 없는 면접 후기들, 진심을 다해 살아온 내 인생을 이력서 쪼가리로 무시해버리는 전형들을 보며 분노 게이지가 마구 상승했다. 균형이 맞지 않는 삶이었다. 올 1,2월만 해도 나를 탈락시킨 대기업보다 더 좋은 곳에 보란 듯이 합격하겠다며 독기를 더 끌어올렸지만, 내 안에서 커져가는 분노와 독기는 나를 해칠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그렇게 감정에 휩쓸려 번아웃을 겪고 난 뒤의 나는 감정의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 장류진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은 2-30대 직장인, 사회 초년생이 시대를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그들이 놓인 외나무다리 같은 시대에서 양 팔을 뻗어 균형을 잡아가며 차근차근 잘 나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남녀 임금 차별이 있는 회사에서 어떻게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해보기 위해 워커홀릭처럼 일하지만 남자와 1,000만 원이나 차이가 나는 연봉을 받는 주인공은 임금 차별과 사내 인간관계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나 이에 대해 깊은 분노와 우울에 휩쌓여 생기를 잃어가기 보다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되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에 반항하며, 때론 용서하는 태도를 보인다. 힙스터이고 싶지만 꼰대인 사장을 둔 죄로 월급을 포인트로 받게 된 직원도, 체계가 없는 스타트업에서 고초를 겪으며 막내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는 직원도, 부조리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한 편으로는 체념한 듯, 한 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이런 시대와 상황으로부터 보호하듯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삶을 꾸려나간다. 언제까지고 이 주어진 상황에 화내기만 해선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나에겐 상당히 인상적인 태도였다.  내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세상에 대해 어느 정도 '그러려니'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가 의지로 바꿀 수 있는 나의 세상들에 더 관심을 쏟기로 마음먹은 나에게 딱 맞는 태도를 가진 주인공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운이 좋게 나와 맞는 주인공들이 나에게로 찾아와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좋아서 책 끝을 접어두었던 부분은 다큐멘터리 피디를 꿈꿔왔지만 결국 회계팀에 취업하게 된 사람의 이야기였다. '연봉계약서에 서명하던 그 순간, 씁쓸한 감정이 들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기뻤다. 방송국이고 피디고 뭐고 지긋지긋했다. 대신 4대 보험이 어쩌고 하는 말들과 연금, 특근수당, 연차와 실비보험 같은 단어들이 그렇게나 따뜻하고 푹신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나도 문화콘텐츠학을 전공하며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길 바라던 사람 중 하나였지만, 계속되는 서류 탈락에 문화고 예술이고 다 지긋지긋해졌고 대기업의 전형 합격 문자와 4,000 언저리의 예상 연봉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회계팀에 들어간 후 다시 피디 공채 공고를 보고, 자소서를 쓰러 들어갔지만 이내 포기하고 나오는 주인공의 마음이 무엇인지 얼핏 알 것 같았다. 대학교 1~2학년 때 꾸던 그 찬란하고 뜨겁던 꿈은 그게 20살이기에 가능했던 것이었고 지금은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라는 걸, 그리고 그 현실도 꽤나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닫는 미지근한 마음의 27살을 겪는 나이기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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