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맞이 뜨개 기록
지난여름 잘한 일 중 하나를 꼽는다면 뜨개모임을 시작한 것이다. 뜨개는 여름에 시작하기엔 더워 보이는 취미이지만, 쌀쌀한 가을과 겨울이 오기 전에 뜨개를 배울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 늘 손으로 무언가를 창작해 내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지난겨울에는 그 로망을 3개월간 물레 도예 클래스를 듣는 것으로 채웠다면, 올 겨울은 뜨개질로 채울 예정이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덩어리 흙, 털실뭉치를 손끝을 사용해 무언가 쓸만한 물건으로 만들어낸다는 점이 나를 창작에 매료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는 누군가의 지시도, 규율도 없고 오로지 나의 마음대로 내 세상을 꾸려나갈 수 있다. 그 작품에서만큼은 내가 세상의 조물주가 될 수 있다.
늘 온라인 세상에서 일하는 나에겐, 이렇게 손으로 만져지는 작업을 하는 시간들이 소중하다. 책 <언캐니밸리>에서 온라인 세상의 가장 극단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실리콘밸리의 사람들이 손으로 하는 도예, 수예 같은 취미를 좋아한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항상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는 무언가, 문자와 이미지로만 존재하고 전기가 끊기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것들을 대상으로 하는 온라인 마케터이기에 일을 떠나서는 물성이 있는, 현실에 진짜 존재하는 무언가를 만지는 작업들을 자꾸만 찾게 된다.
다양한 공예의 세계 중 뜨개질은 왠지 진입장벽이 낮아 보였다. 엄마를 포함해 주위에서 뜨개하는 사람들을 몇몇 보기도 했고 초등학생 때도 배우는 과목이기 때문이다. 폭닥한 이불속에 파묻혀서 요리조리 손을 움직이며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일석이조! 그러나 혼자 뜨개질을 시작해 보려고 도전했을 때 나는 좌절했다. 가장 기초적인 코바늘 사슬 뜨기 하나도 완성하기 힘들었다. 뜨개인에게 필요한 근육은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근육과 달랐다. 손에 힘이 잘 안 들어가지 않아 실이 자꾸 빠졌다.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사슬 뜨기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게 뜨개실과 코바늘을 저기 어딘가 처박아둔 지 몇 개월이 흐른 후 운이 좋게도 사내 뜨개모임에 초대받았다. 사슬 뜨기 실패의 경험이 있었기에 잘할 수 있을지 망설여졌지만 함께하면 뭐든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역시 함께하는 것의 힘은 대단하다는 것을 이번에도 느꼈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함께하는 것의 중요성, 협업과 연대의 좋은 점들을 자주 잊곤 하는데 누군가와 무엇을 함께 하는 경험은 언제나 나를 더 좋은 쪽으로 이끈다. 뜨개모임에 함께 하는 멤버들이 모두 평화롭고 다정하고 아기자기한 동시에 뜨개에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 사슬 뜨기를 넘어서 한길긴뜨기, 겉뜨기, 안뜨기 등 다양한 기법들을 천천히 배워나가고 있다. 나를 도와주는 한 사람만 옆에 있더라도 세계는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더 확장된다. 그토록 만들고 싶었던 코스터도 드디어 하나 완성해 보았고, 지금은 가을맞이 양말 뜨기에 도전하고 있다. 대바늘은 처음인데 코바늘과 다른 매력이 있어 재미있게 배우고 있다.
퇴근 후 노란 불빛이 켜진 근처 카페에 둘러앉아 각자의 세상에 빠져 작은 창작을 하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 든다. 시간을 들이는 만큼 쌓이는 코들, 그 코들이 조금씩 쌓여 무언가 형체를 만들어가는 것을 보는 즐거움, 그리고 내 손에 닿는 따뜻하고 폭신한 털실들의 감촉만으로도 이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