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당신이 글을 읽거나 쓸 때의 표정이 못마땅해서, 분위기가 유난스러워서 가능하면 글이라 불리는 것을 읽거나 쓰지 않으려고 한다는 봄의 말을 들었을 때 정윤은 그들의 관계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정윤은 어떤 일의 결과가 명확하게 주어지기 전까지 스스로 결론짓는 사람이 아니었다. 미룰 수 있으면 끝까지 미루는 것이, 막힌 길에 다다라 싱겁게 패배를 시인하는 것이 그에게 있어 최고의 선이었다. 이번 일 또한 정윤의 회피적인 성격에서 파생한 일이라는 것을, 그러나 예상보다 훨씬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났다는 것을 정윤은 알고 있었다. 그 깨달음은 고통과 다르지 않았다.
봄은 태어났을 때부터 정윤과 비슷한 구석이 없었다. 봄이 배내웃음을 할 때 어렴풋이 보인 입술 아래 작은 보조개가 아니었다면 정윤은 끝까지 병원의 실수로 아이가 바뀐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 보조개는 평생 동안 정윤 스스로만 알고 있는 것이었다. 웃어도 보이지 않고 찡그려도 보이지 않는, 특정하고 어색한 입모양을 해야만 보이는 것으로 타인에게는 보여줄 일이 없는 정윤만의 것이었다. 학창 시절 정윤은 거울을 보며 보조개가 부각되도록 웃어보곤 했다. 특별할 것 없는 인상에 무엇 하나라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욕망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정윤의 비밀 같은 유전자를 공유한 채 태어난 봄은 그것으로 제 몫을 다한 듯 독자적인 인생을 살아갔다. 정윤은 그런 봄이 부럽고 기특했다. 그리고 두려웠다. 무엇 하나 감당하고 완수해 본 적 없는 정윤의 인생에 봄은 당당하게 자신의 지분을 요구했다.
봄을 키운다는 것은 정윤의 인생이 이전과 전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윤의 인생에 봄이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봄의 인생에 맞춰 정윤이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윤은 전에 없던 압박감과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끼면서도 성실하게 제 할 일을 해나갔다. 정윤에게 이런 성실함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면 봄이 정윤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종 감사했다. 봄에게. 그리고 봄을 내어준 운명에게.
그 감사는 봄의 나이와 반비례해서 빈도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봄은 냉철하게 말하기를 즐겨했고 그것은 곧 누군가의 마음을 할퀴기에 적합했으며 그 누군가는 자주 정윤이 되었다. 정윤이 살아오면서 사용해 본 적 없는 단어들이었고 구사해 본 적 없는 화법이었다. 정윤은 봄이 어디에서 그런 것들을 학습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다만 봄이 무슨 이유로 뾰족한 마음을 품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정윤이 짐작하기로 봄은 그럴 만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1도만 틀어져도 평행하지 못하는 직선처럼 봄과 정윤은 나란히 걷지 못했다. 그 각도는 서서히 그리고 꾸준하게 벌어져 두 사람은 결국 마주 보는데 실패했다.
정윤이 끊임없이 회피하는 동안 봄은 끈기 있게 둘 사이의 균열을 통보했고 마침내 정윤의 가장 약한 곳을 건드려 그의 동의를 받아낸 것이다.
봄의 조금 오래된 사춘기가 끝나간다고 믿던 어느 여름날 아침이었다.
그렇다. 이것은 사춘기가 아니라 봄 그 자체였다. 봄의 정체성이었고 17년 육아의 결과였다.
정윤은 얼음이 녹아 커피라고도 할 수 없는 음료를 입에 넣고 유리컵 밖으로 한두 방울씩 흐르는 결로를 손가락으로 짚어보고 있었다. 해결책을 알 수도 없었지만 원인은 더더욱 알 수 없고, 도움을 청할 사람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정윤은 이런 식의 외로움에 처해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외로움이라기보다는 고독에 가까웠고 고독이라기보다는 고뇌에 가까웠다. 가만히 업보라는 단어를 떠올려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