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문동 Aug 26. 2024

봄과 정윤 II

 우당탕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정윤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봄이 던진 보온병이 방문에 맞았고 주변엔 알 수 없는 액체들이 여기저기 튀어있었다. 정윤은 상황을 파악하느라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었다.
 “지겨워 죽겠어! 지겨워! 숨 막혀! 엄마랑 사는 거 숨 막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이게 다 뭐야?”
 진우는 출근 한 뒤였고 자다 깬 온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엄마 제발 좀 그만하라고. 남의 글 베끼는 거. 그런 엄마의 회피적인 성격, 지독한 방어 기제, 진취적이지 못한 거, 다 내가 배웠잖아. 난 이렇게 살기 싫은데 엄마 피가 내 속에 흐른다고……. 제발 좀 이제 그만해, 엄마.”
 정윤은 할 말을 잃은 채로 눈을 끔뻑거렸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과거에 얽매이는 거……. 엄마는 나를, 우리를 낳은 게 그렇게 후회되는 일이야? 늘 뒤만 보고 있잖아. 언젠가는 돌아갈 것처럼……. 거기서 한 걸음만 넘으면 현실인데 엄만 늘 그 뒤에 숨어서 나를 못 봐. 현실을 못 본다고.”


  봄은 식탁으로 다가와 정윤이 쓰고 있던 노트를 찢어서 버렸다. 다시는 찾거나 붙일 수 없게 잘게 찢었다. 정윤은 가위에 눌린 것처럼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봄을 바라보았다.
 

 정윤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를 지금 막 푼 느낌이었다. 봄의 사춘기는 사실 정윤의 삶에 태도에 대한 질책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봄의 방황이 왜 그렇게 길었는지 알 것 같았다.

 봄은 다 알고 있었구나. 정윤이 봄을 알지 못해 어려움을 겪던 시간 동안 봄은 다 알았다고 생각하니 숨고 싶었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과거까지 모두 잊히는 곳으로 숨어서 다시는 봄이 알아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아무도 알지 못하던 정윤의 정체를, 정윤의 속내를 알아차린 게 봄이어야 했을까. 그러기에 봄은 아직 어리고 어리석고 배워야 할 게 많았지만 한편 정윤은 이상하리만치 홀가분했다. 외로움과 고독, 아집 같은 것들을 봄이 모두 찢어서 버린 것처럼  안심이 되었다.


 “네 생각엔 그렇게 세상 모든 게 엉망이니? 세상이 엉망인 것은 네 탓이 아니지만, 네가 그렇게 엉망인 것은 순전히 네 탓이야. 네 생각만큼 난 엉망인 사람이 아니고.”


 속마음과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와 잠시 놀랐지만 정윤은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봄의 태도들은 분명히 고쳐야 하는 것들이었고 봄을 위해서라도 정윤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엄마 인생이니까 엄마 마음대로 해. 엄마 인생 후진 거지, 내 인생 후진 거 아니니까. 난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쓸 거고 엄마처럼 안 살 거야.”

 엄마처럼 안 살 거야,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 거야, 하는 말들이 귀에 울려서 정윤은 노래를 크게 틀었다. 평소에 정윤은 라디오나 노래를 틀지 않았다.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로 혼자 있을 때면 의도적으로 고요의 상태를 만들곤 했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정윤은 유행가를 모르는 삶을 살아왔다. 이십 년 전의 노래를 틀었다. 봄이 태어나기도 전의 것이었다.


 봄이 태어나기 전, 엄마와 함께 보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엄마처럼 살기 싫다고 소리를 지르자 주인공의 엄마가 딸의 뺨을 때리던 장면이 생각났다. 정윤의 엄마는 웃으며 너무 극적이라고 했다. 드라마니까 극적이지, 드라마니까. 정윤이 집중하지 않은 채로 대답했던 그 장면을 오늘 다시 보았다. 정윤도 봄의 뺨을 내리쳤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봄의 삶은 조금 달라질까.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 엄마보다는 나은 삶을 살겠다는 뜻인지 생각하다가 정윤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보행자 신호로 바뀐 횡단보도에 태권도복을 입은 아이들이 길을 건너고 있었다. 봄과 온이 어릴 때 다니던 태권도 학원의 도복이었다. 저 학원 참 오래 하네, 생각하다가 정윤은 깜짝 놀랐다. 핸들을 잡은 손가락 위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웠다. 하늘색의 여름 도복을 입은 봄이. 밤색 띠를 둘러매고 엄마, 나 오늘 밤띠 땄어, 하고 달려오던 봄이. 밤색 띠의 의미를 알지 못하던 정윤이었지만 우리 딸이 최고라며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던 그 여름밤이.
 정윤은 당장 차에서 뛰어내려 아이를 돌려세우고 싶었다. 네가 혹시 그때의 봄이니, 물으며 안아주고 싶었다. 한 번만 더 품에 꽉 채워 아이를 안을 수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짧지 않게 살아왔는데 왜 아직 경험하지 못한 마음들이 남아있을까. 왜 아직 생경하고 이질적인 감정들이 잔재할까, 정윤은 한참을 더 생각했다. 삶을 꾸려가는 일이 영원형벌처럼 느껴졌다.


 정윤은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이전에 육교가 설치되어 있던 이곳은 봄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가끔 정윤이 봄을 데리러 올 때면 일부러 육교를 지나 집으로 걸어가곤 했는데 온의 세 번째 생일 다음날 힘없이 무너져 내려 여러 사람이 크게 다친 아픔의 장소이기도 했다.


 현장에 둘러쳐진 안전펜스 앞에서 봄이 엉엉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정윤은 봄의 상실감에 마음이 시려 함께 울었다. 봄의 세상들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무력감과 두려움이 몰려왔었지만 이제 정윤의 세상은 봄으로 인해 모두 무너지고 있었다.

월요일 연재
이전 11화 봄과 정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