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가 물었을 때 정윤이 고민한 건 캥거루를 보고 난 뒤의 일이었다. 잠시 후면 동이 틀 것이고 정윤은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야만 했다. 오늘 하루만 더 머물면 어떨까 생각한 건 분명 진우 때문은 아니었다. 진우는 남자의 친구였고 정윤이 남자와 연애하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으며 정윤을 처음 보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여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정윤은 진우를 철저하게 경계했다.
“위험하지 않다면……. 좋아요. 먹을 걸 좀 들고 가죠. 통행료.” 진우는 대답 대신 웃으며 음식을 챙겼다.
집 밖으로 나오자 어슴푸레하게 동이 트고 있었다. 둘은 낡고 큰 포드 세단을 타고 조용한 동네를 깨우며 달렸다. 청소일을 하는 사람들이 부지런히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른 작물의 경우 새벽같이 출근을 하기도 하지만 블루베리는 아침이슬이 마르고 난 뒤 수확해야 하기 때문에 날이 완전히 밝아지면 일을 시작했다.
호주인들이 운영하는 공장형 농장은 급여와 복지 수준이 높은 편이었고 워킹 비자가 없으면 일할 수 없는 합법적인 곳이었다. 반면 인도인들이 운영하는 소규모 가족 농장은 관광 비자를 가지고서도 몰래 일할 수 있었지만 급여 역시 법에서 정하는 것의 3분의 2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처음에 코프스 하버로 오는 사람들은 한국 시급의 3배 이상 되는 급여를 받게 될 것이라 부푼 꿈을 안고 떠나오지만 곧 취업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급한 대로 집주인이 소개해 주는 인도인의 농장에서 일하게 된다고 했다. 호주 농장에 대기를 걸고 뒤늦게 연락이 오면 그때는 블루베리 수확철이 끝나가거나 인도인 주인들과 정이 많이 들어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고도 했다.
블루베리는 다른 농작물들에 비해 힘이 들지 않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 특히 여자들이 선호해서 코프스 하버에는 한국인 여자 워커들이 다른 농장지역보다 많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정윤은 진우에게 왜 코프스 하버에 오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 얘기 범이한테 못 들었어요?” 범이라는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왔을 때 정윤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네. 그런 이야기를 할 시간까지는 없었던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예요?” “군대 동기예요. 몇 년 동안 연락이 되지 않다가 제 페이지에 호주에 간다고 올린 포스팅을 보고 메시지를 보내왔더라고요.” 정윤은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저는 무역 전공인데 졸업을 앞두고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한인마트가 하나도 없는 마을을 찾아오게 된 거예요. 사실 한인 마트가 없는 동네라고 하면 차고 넘치죠. 대도시에나 있는 거지, 이런 마을에서 누가 한국 물건을 찾겠어요?” 정윤이 궁금하다는 듯 바라보자 진우는 시선을 전방에 고정한 채 말을 이어갔다. “딱 중간이잖아요. 여기가. 시드니와 브리즈번의 중간. 시드니와 브리즈번이 차 타고 열두 시간, 그러니까 시드니와 코프스 하버가 여섯 시간, 코프스 하버에서 브리즈번까지 여섯 시간. 중간에 하나 정도는 있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정윤 씨는요?”
“저는…….” 그 순간 정윤은 비명을 토해냈고 진우는 급제동을 했다. 방금 전까지 비어있던 도로에 포드보다 훨씬 더 커 보이는 캥거루 성체가 보닛을 막아서고 어슬렁거렸다.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에요. 그런데 좀… 무서워요. 먹을 걸 꺼낼까요?” “너무 무서우면 억지로 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조금 보다가 돌아서 가죠.” 순간 어미 캥거루의 주머니 속에서 빼꼼하고 얼굴을 드러내는 새끼를 보자 정윤은 왠지 마음이 놓였다. “저도 새끼를 본 건 처음이네요. 오늘 운이 좋았어요.”
차를 뒤로 빼며 진우가 말했다. 어미 캥거루는 조금 더 따라오다가 포기한 듯 숲 속으로 사라졌다. 민가를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 이런 울창한 숲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진우는 조금 더 가면 또 다른 바다가 나올 거라고 했다. 정윤이 원한다면 가봐도 좋다고 했고 정윤은 원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선 흔하디 흔한 고라니가 세계적으로는 멸종 위기인 것처럼 캥거루도 그래요. 여기서 캥거루는 하루에도 수십 마리씩 로드킬을 당해 죽으니까 나중엔 무감각해져요. 정윤 씨가 신기해하니까 나도 덩달아 여기 처음 왔을 때 기분을 오랜만에 느껴보네요.”
진우는 원래 말이 많은 건지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건지 구분할 수 없게 쉬지 않고 말을 했다. 해는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고 정윤은 아영이가 자신이 없어진 걸 알고 기다리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진우의 전화기를 빌려 아영에게 함께 출근하자고 말한 뒤, 출근시간이 되기 전에 집에 도착하겠다고 했다.
아영은 농장에선 보기 드문 영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인도인 농장주의 손녀와 절친한 사이가 되어 한국인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땡볕에서 일할 때 농장주의 가족들은 시원한 그늘 아래서 과일을 선별하고 포장하는 일을 했는데 아영이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보고 떠나간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서안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도 그와 관련 있을 거라고, 범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정윤을 위로하는 시도들이 있었고 이후로 정윤은 아영을 더 친근하게 느꼈다.
만난 지 한두 달도 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처럼 많은 감정들이 생산되고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정윤이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이었다. 익명이 보장되는 나라로 떠나왔지만 그 어느 때보다 정윤의 이름과 정체성이 싱싱하게 살아 펄떡거렸다. 사라졌으면 했던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과오와 과거였다고 정윤은 고쳐 생각했다.
“여기에 정말 맛있는 라테를 파는 집이 있어요. 이 카페 때문에 일주일에 한두 번은 일찍 일어나서 꼭 여길 와요.” 진우는 잠깐만 기다리라며 정윤을 벤치에 앉혀두고 사라졌다. 정윤은 그가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생각하다가 그에 대해 판단하기를 멈추었다. 스쳐 지나가도록 두는 게 좋을 것 같은 인연이었다. 잠시 후 진우는 커피 두 잔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정윤은 순간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숨기고 고맙다며 컵을 받아 들었다. “여기선 어딜 가나 이렇게 예쁜 아트를 해주니까 따뜻한 라테를 마실 수밖에 없다니까요.” “네. 정말 예쁘네요. 그런데…….”
“저기 봐요! 저기 멀리 물이 솟아오르는 거 보여요? 고래가 헤엄치는 거예요. 이 동네엔 혹등고래가 많이 살거든요.” 정윤의 말을 끊으며 다급하게 소리치던 진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침착하게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정윤은 찌는 듯한 더위와 뜨거운 커피의 열기를 느끼며 멀리 작은 물방울들이 튀어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학교 앞의 카페 ‘돌핀’에서 보았던 즉석사진 속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진우의 말에 의하면 돌고래가 아니라 혹등고래라고 했지만 정윤에게 중요한 건 바닷속에서 춤추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저들은 춤추고 있는 게 아니라 생존하고 있는 중이었음을. 그날, 그 작은 카페에 앉아서 본 춤추는 고래와 매력적인 부부는 ‘살아가고’ 있는 중이었음을.
“그 사람……. 아직 군대에 가기 전이라고 했어요.” 정윤은 한참 동안 혹등고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진우는 무슨 말인지 한참을 생각하는 듯했다. “아……. 범이 그 녀석은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다음에 만나면 혼내줄게요. 커피는 안 마셔요?” 진우는 커피 맛의 평가를 재촉했다.
“사실 저 뜨거운 커피를 안 마셔요. 더군다나 오늘같이 이렇게 더운 날엔……. 그런데 이 커피 정말 맛있네요. 여기까지 일부러 올 만 해요. 앞으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 오늘이 생각날 것 같아요.”
정윤은 학교 앞 카페의 주인 부부가 지금쯤 어디에서 살고 있을지 궁금했다. 멀리서 보면 춤추는 것 같아 보이는 삶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투쟁의 몸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두려움도 부러움도 사라지고 없었다. 오직 손바닥의 온기만이 현실이라는 감각을 깨워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