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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문동 Aug 13. 2024

진우Ⅱ

 다 같이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각자의 재능대로 무료 수업을 열었다.


 서안이 모두를 거실로 불러내어 요가매트를 깔고 수업을 시작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먼지가 풀풀 날리는 카펫 위에서 서안을 바라보고 앉아 어설픈 자세를 취했다. 요가라고는 할 수 없는 동작들을 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서안은 사뭇 진지하게 웃지 말고 따라 하라고 경고했지만 얼마 안 가 자신이 가장 크게 웃어버렸다.


 그 순간 정윤은 일기 쓰기 수업을 하려고 했던 계획을 조용히 접었다. 서안이 요가의 얼굴을 닮았다면 정윤은 일기 쓰기의 얼굴을 닮았다. 일기 쓰기 수업엔 반짝이는 가루가 떨어지는 듯 환하게 웃는 장면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서안의 마지막 얼굴이었다.


 그녀는 다음 날 아침 사라졌다. 반짝이는 웃음과 함께. 그리고 잠시동안 정윤의 애인이었던 남자와 함께.
 정윤은 남자가 침대맡에 남겨놓은 쪽지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나의 뮤즈 안녕, 영원히 기억할게.

 정윤은 그 순간 배신감보다 창피함을 먼저 느꼈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출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겨우 거실로 나왔다. 모두가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남자가 사라진 후 더욱 낯설게 느껴졌고 그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꿈같이 느껴졌다.  

 

 숨겨두었던 무모함이라는 감정이 둑이라도 터진 것처럼 솟구쳐 올라왔다. 어떻게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와 손을 잡고 입을 맞출 수 있었을까. 그의 이름은 본명이었을까. 여행지의 전화번호는 언제라도 바꿀 수 있는 건데 어째서 한국 전화번호를 물어보지 않았을까.

 남자는 정윤이 사랑을 시험하기도 전에 답을 내놓고 간 첫 번 째 사람이었다.
 

 정윤은 남자를 탓하는 대신 자신을 채직찔했다. 수치심과 죄책감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다그쳤지만 정윤은 당장 갈 곳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돌아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연습하다가, 가장 가까운 도시를 알아보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괜히 안부를 묻기도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은 매점에 가지도 않고 이른 저녁을 준비했다. 정윤은 막 낮잠에서 깬 척하며 멋쩍은 표정으로 주방일을 도왔다.


 “언니, 내일 저희 농장 같이 가실래요? 집에만 있기 심심하실 것 같은데 제가 농장주에게 대충 이야기는 해 놨어요. 괜찮다고 오래요.”
 아영이라는 동생이 말을 걸어왔다.


 이 나라에서 관광 비자로 일을 하는 것은 흔한 풍경이었지만 정윤은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가뜩이나 불안정한 삶에 불안요소를 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일 아침에 답을 줘도 괜찮을까요? 출근하게 되면 일찍 일어나서 준비할게요. 고마워요.”
 정윤은 다음 날까지 이곳에 있게 된다면 아영을 따라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밤 정윤은 짐을 꾸렸다. 아무도 몰래 이곳을 떠날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영을 따라나설지 정하지 못한 채 꼼꼼하게 자신의 것들을 챙겨 넣었다.
 

 침대 끄트머리에 떨어질 듯 몸을 웅크리고 잠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노크를 하는 소리에 정윤은 화들짝 놀라 일어나다 바닥에 무릎을 찧었다. 이층 침대에서 자고 있는 아영이 깰까 봐 앓는 소리도 하지 못하고 방문을 열었지만 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똑똑.

 현관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여봐도 소리의 출처를 알 수 없었고 소리는 점점 커지다가 주방의 보조 출입구 앞에서 멈추었다. 짧은 시간 동안 정윤은 남자가 돌아온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사실 남자는 서안과 관계없이 잠시 바람을 쐬러 간 것이고 정윤을 두고 간 것이 생각 나 빠르게 돌아온 것이리라.


 그 순간, 축축했던 남자의 손바닥 감촉이 떠올랐다. 남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지금쯤 땀이 흥건한 손바닥으로 서안을 만지고 있을 것이다, 확신했다.
 

 정윤은 사람들을 깨우려 몸을 돌리다가 눈을 비비며 서있는 진우와 마주쳤다. 진우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진우는 식탁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식빵 몇 조각을 들고 주방의 보조문 앞으로 다가갔고 정윤은 조용히 뒤를 따랐다. 진우가 문을 열고 빠르게 식빵 조각들을 멀리 던져버리자 문 앞에서 쿵쿵거리던 커다란 존재가 방향을 바꾸어 식빵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캥거루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정윤은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다리의 근육들을 불끈거리며 성에도 찰 것 같지 않은 식빵 몇 개를 주워 먹겠다며 최선을 다해 뛰어가는 존재.


 “혹시 배에 새끼가 있는 건 아니었을까요? 좀 더 넉넉하게 챙겨줄 걸 그랬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 숲에는 먹을 게 충분하니까. 그냥 사람이 좋아서 들른 거예요.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자동차를 막고 통행료를 내놓으라고 텃세를 부린다니까요.”
  진우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정말이에요? 무섭지 않아요?”
 “뭐, 여기는 그런 동네니까요. 먹을 걸 던져주거나 아무것도 없을 땐 후진으로 도망가고는 하죠. 하하.”
 

 진우의 웃음소리를 듣고 긴장감이 풀리자 정윤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터진 웃음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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