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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문동 Aug 24. 2024

봄과 정윤

 봄은 민감한 아이였다. 감각에 민감했고 유행에 민감했고 사람들의 반응에 민감했다. 언뜻 보면 무심한 듯 보이지만 정윤은 그게 봄의 방어 기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봄은 밤을 새워가며 타지에서, 외국에서 유행하는 옷들을 연구했고 처음 봄이 그 옷을 입고 나타나면 비웃던 아이들도 곧 봄이 선도하는 유행에 동참하곤 했다.       

 타고난 감각의 소유자라는 평을 듣고 싶어 했지만 봄이 밤새도록 하는 노력을 정윤은 알고 있었다. 정윤은 무엇 때문에 봄이 그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정윤과 진우 모두 직장 생활을 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으나 봄은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 집안이 풍요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윤은 봄의 휴대폰을 뺏어도 보고 SNS 계정을 지워도 봤지만 봄의 타인에 대한 탐색은 끊을 수 없었다. 무엇에 중독되어 본 적 없이 무난한 삶을 살았던 정윤은 당황스러웠다. 대출을 끼어 샀던 아파트의 빚도 거의 다 갚았고 아이들이 원한다면 원하는 만큼 사교육을 시켜줄 수도 있었다.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했던 정윤은 봄과 대화를 할 때마다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정윤이 틀어놓은 자기 계발 동영상을 흘끗 보던 봄은 들으라는 듯 큰 한숨을 쉬었다.  
 “뭐가 문제야?”
 평소 같으면 못 본 척했을 정윤이 입을 열었다.
 “이런 건 다 성공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잖아. 이런 건 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잖아.”
 정윤은 봄의 생각들이 놀랍고 신선했다. 정윤은 그런 식의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무자본으로 할 수 있는 것들도 있잖아. 그 사람들도 처음부터 풍요로웠던 건 아닐 거야.”
 “엄마가 뭘 알아. 회사원이…….”
 “가난이 동기가 되는 일도 있잖아. 엄마는…….”
 

 봄은 엄마 때 이야기는 하지 말라,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엄마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정윤이 닫힌 방문에 대고 삼키다시피 말했다.  
 

 봄이 어렸을 때 정윤은 다른 집 아이들의 사춘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고 정윤에겐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자신했다. 그 생각은 우월감과 비난에 가까웠다.
 

 처음부터 정윤이 잘못된 방향으로 아이를 키운 것이 아니라면 언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게 인생의 본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윤의 보상심리는 크게 구멍이 났다. 어디에서도 아이를 기르는 방법에 대해서 교육받지 못했지만 세상은 요즘의 부모들이 교과서대로 아이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아우성이었다.

 

 정윤에겐 교과서가 필요했다. 교사가 필요했다.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필요했고 조력자가 필요했다. 정윤이 가진 거라고는 파도처럼 밀려왔다 쓸려나가는 세상의 기준들이었고 정윤은 그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허우적거림과 동시에 아이가 파도에 닿지 않게 가만히 들어 올렸다. 아이는 안전하고 권태로웠다.

 봄이 유치원을 다니던 때부터 정윤은 봄의 계획표를 냉장고에 붙여두고 잊은 적 없이 행사들을 챙겨주었다. 하루는 정윤이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 아침 일찍 출근을 하게 되었고 진우는 아무 생각 없이 봄이 좋아하는 공주 드레스에 구두를 신겨 등원을 시켰다. 그날은 아이들이 등산로에서 맨발 걷기를 하기로 계획되어 있는 날이었고 봄은 공주풍의 드레스를 입고 뾰족구두를 손에 든 채 맨발로 황톳길을 걸었다.

 

 사진을 보게 된 정윤은 경악했다. 봄은 옆에서 함께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시뻘게진 얼굴로 혼자만 원복을 입지 않았다 했다. 그날의 일로 정윤은 며칠 동안 계속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진우는 그런 일에 에너지를 쏟는다고 타박했지만 정윤의 육아란 그런 것이었다. 육아에 존재하는 단어라고는 죄책감과 효능감 밖에 없는 것처럼 정윤은 두 단어 사이에서 씨름했다. 시소 위에서 달리기를 하는 것 같았다.



 봄에게 책을 읽어주던 정윤은 나라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 텐데,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
 네 살의 어린 봄은 끈질기게 물어왔다.
 “엄마가 작가이던 시절이 있었거든, 오래전에.”
 “정말이야? 엄마가 이런 동화책을 쓰고 그린 거야? 나도 읽어 줘, 그 책.”
 “응. 엄마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어. 지금은 엄마가 쓴 책을 읽어줄 순 없지만 엄마라면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갔을지 들어 봐.”


 정윤은 즉흥적으로 그림책에 맞는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었다. 아이는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러다 봄은 다시 첫날 이야기부터,라고 요구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는 처음의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면 봄은 자신의 목소리를 입힌 첫 번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윤이 지은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봄은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갖고 있었다. 정윤은 봄의 목소리로 듣는 이야기가 좋았다. 자꾸자꾸 듣고 싶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정윤은 출근 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옮겨 적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필사할 책을 발견했다고 설레는 마음으로 진우에게 자랑을 한 후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정윤을 배신하지 않는 것,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좋았다. 새벽과 커피와 책, 혼자만의 시간은 정윤을 지켜주는 종교 같은 것들이었다. 봄과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기에 곧 마음이 분주해졌다.

계단 꼭대기에서 그가 외쳤다.
“제제, 넌 천사야!”
나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웃기 시작했다.
“천사요? 아저씨가 아직 저를 잘 몰라서 그래요.”   

 정윤은 주인공인 제제를 사랑했다. 집에 오는 손님마다 들려 보내던 책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몇 년 동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지나가다 들린 서점에서 다시 발견해 몇 권이나 다시 집어 들어온 참이었다.
 정윤이 어렸을 때 읽었던 제제, 정윤이 어른이 되어 읽었던 제제, 정윤의 아이가 아이 었을 때 읽던 제제, 그 아이가 이제 아이가 아닐 때 읽는 제제는 다 다른 제제였다. 정윤은 봄에겐 제제가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고 읽기를 권하고 싶었다. 퇴근 후 봄의 책상 위에 한 권 놓아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 건 그게 아냐. 한 송이 장미에 진짜 그런 마법의 힘이 있는지 그게 궁금하단 말이야.”
 “진짜 좀 이상하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지어내면서, 애들이 뭐든지 다 믿는다고 생각하나 봐.”
 “그런 것 같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루이스가 다가왔다. 동생은 점점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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