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동병상련 통치의 또 다른 이름
수메르의 파격적인 문명 혁명 이후, 유사한 국가는 계속 등장했고 문명의 범위는 지속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처리해야 할 정보의 양은 증가했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변화의 속도 역시 과거에 비해 빨라지다 보니, 기존 질서에 적응하지 못한 이탈자도 꾸준히 발생했습니다. 마음의 안정을 찾아 떠나는 사람도 있었고, 더 큰 기회를 찾아 이동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 바로 아테네였습니다.
본래 아테네는 척박한 토양과 부족한 자원 때문에 인구가 모이는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초기에는 부족 중심의 연합체 수준에 불과했으며, 국가라고 부르기에는 매우 미흡한 수준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동네 유지들이 돌아가며 이장을 맡는 수준의 구조였던 것이지요.
기원전 6세기,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등장해 국가의 기틀을 잡은 뒤, 클레이스테네스가 부족을 통합하고 통치 체계를 안정시키기 위한 구조적 개혁을 실시합니다. 추첨제 확대와 민회 권한 강화 같은 조치들이 이 시기에 도입되었고, 이것이 아테네 민주주의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아테네는 지역을 압도할 강력한 지배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탓에, 독재는 곧 혼란을 부르는 선택지였습니다. 따라서 합의에 기반한 통치 체계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을 선택하게 만든 배경입니다.
국가의 틀과 통치 제도를 마련했음에도 아테네는 여전히 약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483년경, 아티카 지역 라우리온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고 상황이 급변합니다. 이 발견을 계기로 주변 국가에서 탈주한 세력, 일자리와 생계를 찾는 하층민, 그리고 다수의 노예가 아테네로 유입되었습니다.
이때 확보한 막대한 은은 국가의 재정을 단숨에 안정시키고, 해군력 강화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해군 증강 직후 페르시아와의 대전이 발생했고, 아테네는 바로 이 은으로 성장시킨 해군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를 계기로 해군 인력이 국가 전력의 핵심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이들을 통치할 수단을 명확히 설계해야 할 필요가 발생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는 왕족과 귀족이 아닌 민간인들의 기여가 압도적으로 컸다는 사실입니다. 상인, 조선기술자, 해운업자, 노를 젓던 평민 계층 등 다양한 민간의 힘이 국가를 지켰습니다. 당시 왕족과 귀족은 주로 말 타고 싸우는 중장기병 중심의 계층이었으며, 해군과는 거의 무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구조적으로 페르시아와의 해전에서 왕족과 귀족의 기여도는 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왕족과 귀족은 군사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평민 계층을 압도할 힘이 없었습니다. 통치에 있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으며, 강자가 약자를 일방적으로 제압하는 기존의 왕정 체제는 성립되기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그런 방식은 내부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따라서 시민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분배하는 민주주의가 당시 상황에서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지였습니다.
민주주의는 대체로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압도할 수 없거나, 귀족들 내부에서도 특정 세력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서지 못할 때 발생하는 경향이 큽니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에너지와 보상을 우선 추구하며, 특별한 이유 없이 권한을 나누지 않습니다. 이런 설계도의 DNA 정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나누는 이유는 단 하나, 나누지 않고서는 상대를 제압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힘이 약한 왕족과 귀족이 자신의 생존과 안위를 지키기 위해 고안한 시스템이라고 판단됩니다.
남을 위한 개인은 없으며, 다른 계층을 위한 계층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DNA 정보는 이런 특징으로 지금까지 계승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시작되는 패턴으로 판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