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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ckie May 12. 2020

집단이 개인을 통제하는 법

켄 키지의 '뻐꾸기 동지 위로 날아간 새'

                                                                                                                                  

어릴 때 일요일 밤이면 KBS1에서 하던 명화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성우들이 더빙한 유명한 영화들을 방영해주던 프로였거든요. 극장 갈 일이 흔치 않았던 저에겐 늘 기다리던 순간이었죠.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명화극장에서 본 건  아마 국민학생(?)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잭 니콜슨의 거칠고 폭력적인 연기와 정신병원의 낯선 분위기가  너무나 무서웠지만, 푹 빠져서 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성인이 된 지금, 이제 책으로 읽어보니 국민학생(?)이 보기에 적당한 영화는 아니었더군요.  그 당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왜 그 영화를 재밌다고 보았는지 꽤나 의아합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저에게 남긴 인상은 매우 강렬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위험한 책읽기'를 독파하기 위해  리뷰가 리스트업 된 도서들을 모두 읽어 보겠다 원대한 목표가 아니었다면 완독이 힘든 책이었겠구나, 라는 예상이 들더군요. 진입장벽이 쉬운 책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요.




주인공 맥머피는 교도소로 가는 대신 수를 써서 콤바인 정신병원에 호송된  신입환자입니다. 그는  수간호사인 랫치드로 대표되는 콤바인 정신병원이라는 집단의 부당함에 끝없이 저항합니다. 하지만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과정 속에서 맥머피는 정신병원과 정신병동의 환자, 양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한채 희생되는 순교자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사실 책의 주인공은 맥머피가 아닌 '나', 브롬든, 인디언 혼혈인, 일명 추장입니다. '나'는 콤바인에 가장 오래된 만성환자죠. '나'의 생존전략은  벙어리인 척, 귀머거리인 척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맥머피는 '나'를 보자마자 이 거짓말을 바로 간파해버리죠.  이 책은 이런 '나'의 시선으로 쓰여집니다.



       





맥머피가 싱긋 웃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며 미소를 짓는다.

내가 규칙을 어길 것 같다 싶으면 꼭 그런 말을 하더군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내 손을 놓는다.






맥머피가 가장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나'는 알아차립니다. 맥머피가 이제까지의 신입환자들과는 뭔가 다름을. 그리고 맥머피 자신도 이야기합니다. 이미 자신의 집단의 규칙에 순응할 뜻이 없음을.  그리고 자신의 비밀을 단번에 알아차린 남다른 감각을 지닌 맥머피에게 '나'는 10년 넘게 살아온 콤바인 정신병원에서 처음으로 '이전과 다름'을 느낍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에는 없었던, 맥머피가 들어오기 전에는 결코 없었던, 탁 트인 들판의 먼지와 흙 냄새, 땀과 노동의 냄새가 난다.




콤바인 정신병원으로 대표되는 수간호사 랫치드와의 대치는 처음 만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둘의 대치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공수가 팽팽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러서일까요. 그들의 싸움은  인내심이 필요할 정도로 길고 지루할 정도로 반복됩니다.   랫치드 수간호사는 교묘한 방법으로 개인(환자)을 통제합니다. 비난하기, 소외시키기, 동료 환자 감시하기, TV시청시간과 같은 사소한 일상 통제하기,  지나친 투약처방, 전기충격, 마지막으로 외과적 수술까지.  이로부터 벗어나고픈 나는 실제인지 환상일지 모를 안전한 안개에 취해 있길 원합니다. 하지는 이것은 도피일 뿐, 해결책은 아닙니다.




밤에 내 침대를 찾아가기가 점점 어렵다. 씹어서 붙여 놓은 껌을 찾을 때까지 여기저기 네 발로 기어 다니며 스프링 밑을 만져 보아야 한다. 안개가 자욱해도 아무리 불평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 이제 나는 안다. 안개가 자욱할수록 그 속에 안전하게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맥머피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안전하게 있기를 원한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우리를 안내 밖으로, 발각되기 쉬운 탁 트인 바깥으로 끄집어내려고 계속 애를 쓴다.




하지만 맥머피가 주장하는 작은 변화들 혹은 반항적 행동들이 정신병동 전체에 작은 변화를 가져 오고 있었습니다. 특히 '내'가 느끼는 변화는 변화는 이제 냄새라는 후각에서 촉각으로 좀더 선명해집니다.   




나는 시트에서 빠져나와 침대 사이로 차디찬 타일 바닥을 맨발로 걸었다. 발바닥으로 타일의 감촉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수천 번이나 똑같은 타일 바닥을 걸레질했는데 한 번도 그 감촉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 걸레질은 나에게는 꿈만 같았다. 오랜 시간 걸레질을 해 왔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발바닥을 통해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리놀륨만이 진짜였다.




변화의 짜릿함을 맛 본 정신병동의 환자들은 맥머피를 지지하며 계속해서 수간호사 랫치드에 반해 다음과 같이 힘들 실어줍니다.  다음과 같이 말이죠.




그들은 단지 텔레비전 시청에 찬성해서 손을 드는 게 아니다. 수간호사에게 반항하기 위해, 맥머피를 중환자실로 보내려는 그녀의 생각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그녀가 말과 행도와 가혹한 행위로 수년 동안 그들을 쥐락펴락한 소행에 대항하기 위해 손을 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콤바인 정신병원이 원하는 것이 환자들의 완벽한 통제 였듯이 환자들이 원하는 것은 콤바인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맥머피의 완벽한 통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신이 희생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맥버피는 순교자처럼 자신을 버리고 맙니다.




나는 명확하게 깨달았다. 나 뿐만 아니라 우리 중 누구도 맥머피를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 우리로서는 맥머피를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맥머피가 그렇게 하도록 만든 장본인이 바로 우리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그런 행동을 하도록 강요한 사람은 수간호사가 아니었다. 바로 우리였다. 그는 의자의 가죽 팔걸이에 큼지막한 손을 대고 천천히 일어섰다. 영화에 나오는 좀비처럼 우뚝 서서 마흔 명의 주인이 내리는 명령에 따랐다. 몇 주일 동안 그가 행동하게 만든 것은 우리였다. 그의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게 된 뒤에도 그를 일으켜 세워 오랫동안 서 있게 하거나, 몇 주 동안 윙크를 하고 웃게 하거나, 그의 유머가 두 전극 사이에서 말라 없어진 뒤에도 그가 계속 행동하도록 한 원동력은 바로 우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책의 제목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일까요? 뻐꾸기 둥지는 원래 정신병원을 일컫는 속어라고 하는군요. 하지만 책에서 발췌한 아래의 두 부분을 읽어보면 집단 속에서 부품으로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개인의 무의미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트 영감은 마치 정확한 시간을 알려 주지도 않지만 정지해 버리지도 않는 오래된 시계, 시침과 분침이 휘어지고, 문자반의 숫자를 떨어져 나가고, 자명종은 녹슬어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시계, 아무 의미 없이 계속 움직이면서 뻐꾸기 소리를 내는 그런 낡고 쓸모 없는 시계 같다.

수간호사는 벽시계를 그녀가 원하는 속도로 맞출 수 있다. 쇠 뚜껑을 열어 안에 있는 문자반들 가운데 하나를 돌리기만 하면 된다. 그녀는 갑자기 일을 빨리 진행시키기로 한다. 그녀는 속도를 높인다. 시침과 분침이 바퀴살처럼 문자반 위를 빙빙 돌아간다. 스크린처럼 보이는 창틀 속 광경이 아침부터 한낮, 그리고 밤으로 어지럽게 광선의 변화를 내비친다. 울리는 소리가 났다가 잦아들었다 하면서 낮과 밤이 격렬히 반복된다. 모두들 정신없이 떠밀려 조작된 시간의 흐름을 쫒아간다.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영화 '박하사탕'이 떠올랐습니다.  세상이, 시절이, 그리고 국가가 한사람의 일생을 이렇게까지 좌지우지 해도 되는가, 라는 생각에 너무나 서글펐습니다. 그의 첫사랑, 그의 증오스러운 직업, 그의 파탄난 가족, 심지어는 그의 절름거리는 다리까지 모두 그 시절과 그 시절의 국가가 그에게 남긴 것이었습니다.



그를 내보낸다고 해서 우리 병동이 입은 피해가 지워지겠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오후 이후로 계속 남아 있을 겁니다. 그가 중환자실로 보내진다면, 바로 환자들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겠죠. 그는 다른 환자들에게 순교자가 되는 겁니다......
.....그는 비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단순히 한 인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처럼 두려움도 느끼고, 겁쟁이이기도 하며 소심하기도 합니다.







콤바인의 환자들과 의사들, 그리고 수간호사, 아니 심지어 맥머피 자신도 자신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혹은 해야만 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결과는 콤바인는 집단과  환자들이라는 집단  모두에게 이용당하는, 그러나 깨어 있으려고 노력했던 개인이었으나 결국은  전체의 부품으로 소모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맥머피의 희생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희생으로 인해 '나'는 정신 병동을 탈출할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죠.   




집단이 개인에게 행하는 폭력이 얼마다 교묘한가를 넘어서, 개인이 집단이 되어버린 순간, 그 집단은 또다른 개인에게 어떤 폭력을 행하는 지 보여준다는 면에서 이 책은 개인과 집단이 갖는 힘의 역학 관계를 유기적으로 보여줍니다.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대항하는 힘을 가진   개인에게까지 집단이 영향역을 행사하려는 것을 확인하는 책을 읽는 과정은 읽는 내내  계속된 불편함이었습니다. 다만 위안이 되는 것이라면 '내'가 아직 자유인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우쳐준 맥머피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개인이  집단이 되는 그 순간은 알아차리기 힘들더군요. 그래서일까요. 순식간에 개인에서 집단으로 변모한 이들이 행하는 폭력은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개인에서 집단으로 변한 그 순간, 혹시 나도 폭력의 한가운데에서 부지불식간에 폭력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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