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물랑 루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기 연민'
여태 내가 알고 있던 뜻은, 스스로만을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기 연민을 혐오했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과 수많은 일이 있고, 나보다 힘들고 괴롭지만 한 마디도 꺼낼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있을 텐데. 왜 자기만 힘들 거라고 생각하지?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온 지 2주가 되어가는 오늘은 런던에서 많이 본다는 뮤지컬 중 '물랑루즈'를 관람했다. 익숙한 제목이지만 내용을 몰라 줄거리만 잠시 찾아본 뒤 극장에 앉았다. 잔잔한 음악이 깔린 하트모양의 무대 설치와 붉은 배경색을 보니 왠지 모르게 우울해졌다.
공연 중간 졸음이 쏟아져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1막이 끝났고, 잠을 깨고 집중하기 시작한 2막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지병으로 죽고 말았다.
여주를 부둥켜안고 엉엉 우는 신을 보며 든 생각은, '연기라서 좋겠다. 어차피 가짜로 죽은 거니까 커튼콜 할 때 같이 쌩쌩하게 뛰어나올 텐데, 부럽다'였다.
영화와 드라마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좋아해서 자주 돌려보던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커플 중 한쪽이 죽는 장면을 볼 때 마냥 슬프고 안타깝기만 했었는데, '그래도 니들은 연기잖아, 잠깐 슬퍼봤자잖아' 이런 생각이 가득했다. 슬퍼서 엉엉 우는 명연기를 보는데 화가 났다. 내가 싫어하는 감정들로 나를 가득 채워 점점 썩어가는 기분이었다.
그 후로 며칠 뒤, 그의 친척어른에게 메시지가 왔다. 봉안당 그의 유골함 위치를 몇 칸 위로 올린다는 소식이었다.
웬일이지? 그래도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래도 가족들이 챙겨주는 마음이 있구나. 돈 때문에 사달이 나더라도 이건 마음에 걸렸구나,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보험금이었다.
그의 앞으로 보상금이 많이 지급 되었고, 그 금액의 1퍼센트도 안 되는 금액으로 몇 칸을 간신히 올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돈은 그가 준 마지막 선물이라는 변명을 하면서, 나머지 돈은 친구 사업에 투자를 한다는 친척 어른. 유골함 위치를 바꾼 건, 그 큰돈을 모두 쓰기 위한 밑밥처럼 느껴졌다. 긴 여행 중 두 번째 여행지에서 다음으로 넘어가려고 새벽부터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던 중이었다. 무거운 짐가방과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넘어지지 않으려 중심을 잡는 와중에 화와 슬픔이 섞여 머리가 어지럽고 눈물이 났다. 왜 너는 이렇게 더럽고 치사한 집안에서 태어난 거야? 이것도 너의 업보일까? 그럼 난 도대체 어떤 업보를 쌓았던 걸까?
그의 누나와도, 친척어른과도 아무와도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 집안사람들이 그를 통해 얼마를 벌었고 가해자가 몇 년 형을 받았건, 더 이상의 정보를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처음에는 애틋하게 연락을 이어갔던 어머니는 보험금 정산이 되자마자 연락이 뜸해졌다고 했다. 누나가 많이 안타까웠지만, 나도 살고 싶다. 당장 내가 나를 돌보기도 버거운데 누구를 챙기기에는 내가 너무 너덜너덜하고 불쌍했다. 여행지에 와서까지 눈치를 보며 골머리를 앓는 내 모습이 괴로웠지만 생각이 낳은 생각이 계속해서 꼬리 잡기를 했다.
그렇게 마음이 썩는 동안 문득 '자기 연민'이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봤다.
자기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진심으로 넓은 마음이 아니라, 나는 강박적으로 나보다 힘든 사람들만을 생각하느라 나를 점점 죽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스스로가 진심으로 불쌍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