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에서 하루를 모두 쓸 수 있는 마지막 날. 느지막하게 나와 스페인식 감자오믈렛을 먹고, 천천히 거리를 돌아다녔다. 걷고 또 걷고, 안 가본 길로 쭉 걸어갔더니 예쁜 건물이 나왔다. 뭐 하는 건물일까 구글 지도를 켜 보니, 대학병원이었다. 무슨 병원이 이렇게 예뻐?
열흘간 좀비 행색으로 출퇴근했던 고대병원이 떠올랐다. 매일매일 오갈 때마다 심장이 크게 뛰고 끔찍한 기분. 오늘이 마지막 병원이고 내일은 장례식일까 봐 두려움에 떨던 날들. 가족들을 마주치는 괴로움. 면회를 들어 가 누워있는 장면을 보는 것. 면회 실패로 바깥에서 초조하게 대기하는 것. 매일매일 속이 울렁이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던 그때의 기억이, 커다랗고 예쁜 건물이 병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스르륵 떠올랐다. 감기가 한번 들더니 좀처럼 낫지 않는 게, 마음에 화를 비롯한 복잡한 감정들이 가득 차 있어 그런가 싶기도 했다.
걷고 걷다가, 먹고 싶었던 삔초(꼬치에 끼워져 나오는 스페인 음식)를 주력으로 파는 타파스가게가 눈에 들어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문어 삔초와 화이트 상그리아를 시키고, 테이블 위에 떨어져 있던 담배꽁초를 휴지로 집어 옆쪽으로 치웠다. 웨이브가 들어간 단발머리의 예쁜 언니(진짜 언니는 아닌 것 같지만 편의상)가 상그리아만큼 싱그럽게 웃으며 술을 가져다주면서 내가 옆쪽으로 치워둔 꽁초를 가져갔는데, 그 표정이 너무 친절하고 행복해 보였고 그걸 보는데 눈물이 났다. 어떤 이유든 여기서 울면 완전 청승 그 자체였기 때문에 숨을 꾹 참고 주변을 둘러봤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있었고, 하늘은 맑았다.
조금 뒤 음식이 나왔다. 문어를 한 입 먹는데, 이렇게 입에서 사르르 녹는 문어는 처음이었다. 꼭 데려와서 같이 먹고 싶은 맛. 해산물을 좋아하던 그 사람 눈이 휘둥그레 해질 맛이었다. 이걸 나 혼자 먹고 있다니, 너무 슬프고 미안했다. 파란 하늘, 맛있는 술, 부드럽고 향긋한 해산물, 맛있는 과일이 가득하고, 바다가 가까이에 있는 축구의 도시. 좋아할 그 개구쟁이 같은 얼굴이 눈에 선해 다시 눈이 뿌옇게 흐려졌다. 결국 청승을 떨게 되었고, 조용히 화장을 고친 뒤 아무렇지 않게 계산을 하고 짱 맛있었다고 인사를 했다.
다시 걸어 도착한 곳은 바닷가. 넓고 까만 바다가 눈앞에 가득 차니 다시 우울 회로가 돌아갔다. 나도 모르게 행복해 보이는 각종 커플들에 눈길이 갔다. 다정히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며 걷는 근육질의 귀여운 게이 커플, 팔짱을 낀 노부부, 행복한 표정으로 셀카를 찍는 어린 연인.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더 바글바글했다. 사람이 많으니 정신이 없어 깊게 우울한 느낌은 들지 않아 다행이었다.
스페인의 마지막 밤. 야경 투어를 듣기로 했다. 수신기로 음악과 설명을 들으며 바르셀로나의 밤 골목을 걷는 프로그램이었다. 술도 낮부터 종류별로 3잔이나 마셨고 종일 걸어 약간은 피곤했는데, 밤거리의 조명과 이곳의 슬프고 무서운 이야기들을 들으니 잠이 확 깼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흐르고 가이드가 마지막 멘트를 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라고.
- 좋은 음식 잘 챙겨 드시고, 건강도 잘 챙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 이 멘트는 내가 장사를 할 때 손님들 리뷰의 답글이나, 음식이 출발할 때 보내드리던 메시지 문구로 가장 많이 쓰던 내용이다. 진심이긴 하지만 누구나 쓸 수 있는 통상적인 인사인데. 정말 정말 많이 쓴 말인데. 남한테 들으니 새삼 눈물이 났다. 한국인만 스무 명 가까이 모여있는데, 여기서 울면 진짜 망신이다. 눈물을 꾹 참는데 결국 한 방울이 흘러 누가 봤을까 너무 창피했다. 툭 치면 눈물이 나는 병에 걸린 것 같아 난감하고 짜증이 났다.
그렇게, 웃을 일도 많고 울 일도 많았던 스페인 여행을 마치고 다음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또 어떤 슬픔이 닥쳐올까? 반나절 정도는 내내 즐거움만 가득한 날이 한 번쯤은 있었으면 좋겠는 생각이 들었다,
P.S. 더불어,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도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