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행복하면 쓰레기, 불행하면 누더기
피렌체에서 만난 작은 행복
이미 단골이 됐던 피렌체 호스텔 앞에 있던 펍.
바 쪽에 앉아있던 낯선 외국인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긴 머리에 수염이 많은 남자. 사람도 없고 티비도 없는 내 쪽을 너무 빤히 보길래 몰래 켠 휴대폰 카메라를 통해 날 보고 있다는 걸 확인한 뒤 마시던 것만 마시고 일어나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스페인에서 동양인 여자를 놀리는 못된 애들을 많이 봤기 때문에 더욱 예민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호스텔까지 뛰면 3초 컷이었고, 직원 2명과 사장님이 나와 얼굴을 텄기 때문에 해코지를 해도 안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다 마신 잔을 들고 다른 잔을 주문하러 카운터로 갔다.
"Are you Korean, right?"
나를 지켜보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 삼성 폰을 보고 알았다고 했다. 뭐 다른 아시안은 삼성 안 쓰나? 그런데 그 아는 체가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첫마디를 트고 난 뒤 그 자리에 서서 얘기를 나누다 합석을 했다. 터키에서 온 청년이었고, 가까이에서 보니까 눈이 선 해 보였다. 뻔한 플러팅 멘트를 안 해서 왠지 마음이 더 편하고 좋았다. 피아노를 좋아해 레슨을 받고, 사무라이를 비롯한 일본 문화를 좋아하고,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하는 그 사람은 가족들 소개까지 마친 뒤 나의 취향과 기분, 생각을 살피기 시작했다. 순수하게 내 이야기와 마음을 궁금해하는 호의적인 이성 외국인.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넘은 지도 몰랐다. 게다가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넘어가는 일정까지 겹치는 걸 알게 되고, '어? 이거 인연인가?' 반짝하는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니가 지금 이럴 때야? 그 사람 떠나보낸 지 1년도 안 됐는데. 니가 남미새니? 이 쓰레기야, 정신 차려라.'
아 그렇지, 참.
죄책감을 때려 맞는 도중, 한국인 여자 세 명이 펍으로 들어섰다. 그가 나에게 저 사람들도 한국인이냐고 묻길래 맞는 것 같다고 하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어느새 그들과 말을 트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고, 이게 무슨 마음일까 생각할 새도 없이 다섯 명이 합석을 해 얘기를 이어갔다. 나를 제외한 그들은 모두 20대로 나이가 비슷했다. 나이를 듣고 보니 나보다는 그들과 더 어울리는 것 같았고,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순식간에 느낀 질투였다. 그걸 깨닫고 더 큰 죄책감이 몰려오기 전에, "My brother, I'm your older sister. Too much older." 같은 이상한 말로 우정인 양 빠르게 포장했다. 그리곤 피곤해서 가봐야겠다고 한 뒤 지나가는 말로 스위스에서 기회 되면 만나자며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는 내가 추천한 맥주를 한잔 주문했고 나를 위해 주문한 건데 진짜 갈 거냐고 물은 후, 문 앞까지 인사를 하러 나왔다.
그날 밤 호스텔로 돌아와 갑자기 또 눈물이 났지만 툭 건드리면 반자동으로 눈물을 쏟던 나에게 큰 일은 아니었다. 그러고 나서 옆 자리에 있던 아르헨티나 친구와 시시덕거리며 터키보이에 대한 마음을 고이 접어 넣었다.
다음날, 이상하게도 온종일 터키보이가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이렇게나 금사빠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그동안 장기 연애로 남자 친구에게 봉인되어 있던 금사빠력이 해제된 건가? 근데 왜 한국에선 안 그러다 외국 와서 이러는 거야? 대화가 중요한 나에게 국제 연애는 꿈도 안 꿔본 일이다.(누가 만나준대?) 긴 머리 남자가 좋은 적, 수염을 기르는 남자에게 관심이 가 본 적도 없었는데. 게다가 다시 연하라니. 사방이 예술인 피렌체를 걸으면서도 머릿속엔 그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의 스토리와 피드를 계속 체크하며,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스스로 정상이 아니고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쯤 적절한 선에서 대화가 마침 끊겼다.
대화가 끊기니 근황이 너무 궁금했지만, 차라리 잘 됐다. 잊어버리자. 다시 마음을 꼬깃 꾸겨 저 바닥으로 꽁꽁 숨겼다.
그 다음 날, 피렌체에서 스위스로 넘어가는 날이었다. 이탈리아 기차들이 모두 파업을 해서 끊었던 차편을 모두 취소했고, 아침 일찍 출발해 기차를 하나씩 새로 끊어 차근차근 가보기로 했다.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에서 처음 기차를 탔는데, 창밖으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잘못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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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기 1시간 전쯤, 기차 이동에 관해 그와 메시지를 나눴다. 그는 나에게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내가 탄 노선을 캡처해서 보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그러겠다고, 나는 이제 곧 열차를 탄다고 다음 노선도 바로 보내주겠다고 했더니 조금 뒤, 어디냐는 질문과 함께 역 내부 사진이 도착했다. 그러더니 곧, 기차 안으로 그가 나타났다. 내가 탄 열차 티켓을 똑같이 끊어 탄 거였다.
"How........"
말을 잃은 나에게 그는
"I don't know"라고 하며 웃기만 했다.
마음으로는 너무너무 반가웠고 miss you so much였지만 차마 티 낼 수 없었다. 이미 죄책감과 자기 검열로 인해 스스로 주책바가지에 쓰레기라고 낙인을 찍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과는 달리, 말은 술술 나왔다. 내가 이렇게 영어를 편하게 하는 사람이었나? 실력은 변함없었겠지만, 대화를 하는 동안 마음에 부담이 없고 오히려 영어를 하는 게 재밌는 지경이었다. 아마 비슷한 수준의 영어라 그러리라 생각했다. 무슨 음식 좋아해? 같은 가벼운 질문부터, 인생에서 뭐가 중요한지, 목표가 뭔지 같은 묵직한 대화도 하며 몇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말했다.
"you have pure heart"
어? 아닌데. 나는 어젯밤 스스로를 무지막지한 쓰레기라고 도장 찍었는데. 그래도 입 밖으로 나온 말은,
"Thank you. I'm happy to hear that. You are so kind"
그렇게 대화를 하고 음악도 듣다가, 서로 기대서 졸다 보니 어느덧 스위스에 도착해 갔다. 시간이 너무나도 빠르게 흘렀다. 나는 터키어 번역기를 돌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물었고 그가 대답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