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그린델발트와 인터라켄

우연과 운명 중에서

by 웨이드



스위스로 넘어간 다음 날, 일행에게 양해를 구한 뒤 그를 만나기로 했다. 내 숙소는 그린델발트, 그의 숙소는 인터라켄. 인터라켄 까지는 기차로 30분이면 갈 수 있고, 배차 간격도 짧았다. 인터라켄에서 만나 산책을 하고 이젤발트로 가서 호수 구경을 하기로 했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인터라켄 역에서 음악을 들으며 그를 기다렸다. 눈길을 뽀득뽀득 밟으며 걷다가, 그가 탄다는 열차 정류장 앞 벤치에 앉아 눈이 덮인 산과 나무들을 구경했다. 그때 나오던 노래는 Kygo와 Gryffin, Calum Scott의 <woke in love>, 사랑에 빠지는 내용과 두근두근 설레는 무드의 노래. 슬픔은 온데간데없고 그를 만날 생각에 싱글벙글한 마음으로 사랑 노래를 듣다가 문득 스스로 도대체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야비한 인간 말종이라고 생각한 그때, 그가 나타났다. 반짝반짝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그 사람이 오물 구덩이에 몸을 처박고 있던 나를 꺼내 장미 향이 날 것 같은 깨끗하고 따뜻한 욕조로 퐁당 넣어 버렸다. 동시에 온종일 틈만 나면 나를 때리고 비난하던 또 다른 내가 입을 꾹 닫고 사라졌고 그 하루 동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30분 정도를 걸어 그의 숙소에 도착했다. 아침 일찍부터 일정을 시작한 그 사람 옷도 갈아입을 겸, 간식도 먹고 좀 쉬다가 나가기로 했다. 창 밖으로 뵈니겐 호수와 설산 뷰를 구경하며 테라스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버스를 타자니 1시간 정도 기다려야 해서, 일단 버스길을 따라 쭉 걸어가다가 중간에 버스를 타기로 했다.


걸어도 걸어도 예쁜 길. 그중 뷰가 유난히 좋은 위치에 잠깐 서서 각자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주변 땅을 유심히 보는 그에게 뭐 하냐고 물었더니, 작은 돌을 찾고 있다고 했다. 기념으로 가지고 갈 작은 조약돌.

작고 예쁜 돌을 찾는데에 나도 합류를 해 몇 개 찾아서 보여줬더니 유심히 보다가 마음에 별로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하얀 돌 한 개가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고, 그러자 "이 떨어진 돌이 내 운명인가 봐." 하더니, 그 돌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찾은 돌을 깨끗한 눈에 씻다가 다시 잃어버리고 말았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니 이 눈을 다 녹여서라도 찾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날은 점점 어둑해지고, 버스가 올 시간이 다가왔다. 그렇게 반짝반짝하던 미소를 순식간에 잃어버린 얼굴을 보니 그에게는 운명이라는 게 중요한 거구나, 느껴졌다.

스위스에 오기 전, 문자를 하다 어떤 이야기 중에 내가 "우연이다 신기하네" 했더니, 그가 "나는 우연은 안 믿어. 운명을 믿지."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뭐든 반만 믿는 나는, 신도 운명도 반쯤만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마 칠십 퍼센트 이상의 운명론자 일 것이라 예상했다.


버스를 타고 이젤발트에 도착했다. 밤에 봐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낮에 보면 엄청나겠구나. 한참 경치를 구경하다 결국 그는 귀여운 조약돌을 발견했고, 우리는 그 길로 저녁을 먹고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버스 시간이 다 되어가서 후다닥 식사를 마치고 나와 버스를 탔다. 그는 나를 얼른 보내려고 했다. 쳇, 조금 늦어도 되는데.

버스 안에서, 유리창을 통해 그 사람을 몰래 구경했다. 어쩌다 이렇게 갑자기, 낯선 외모의 형제의 나라에서 온 사람에게 마음이 움직인 걸까? 이 사람의 운명은 뭐고, 나의 운명은 뭘까? 지금 이렇게 된 게 터키보이를 만날 운명 이어서라기엔 떠나간 사람이 너무 불쌍했다. 떠난 그의 운명과 내 운명이 따로 있는데 맞물렸던 거라고 해도, 그래도 너무 불쌍하고 미안했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는, 이탈리아가 마지막 여행지였다. 그런데 갑자기 스위스에 가면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고, 물가가 어마무시하다는 후기들을 보고 지레 겁을 먹어 짧게 잡은 일정이었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너무 예쁜 경치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는 효과가 있었을 것 같다.)


디테일하게 생각을 하다 보니 맞물리는 점들이 더 나왔고, 그건 점점 더 그가 내 운명일까? 하는 합리화를 하기에 딱 좋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인터라켄에 도착했다. 나는 이제 마지막일 그에게 뭐라도 주고 싶어 인터라켄 역에 있는 마켓에서, 그가 유심히 보던 스위스 마그넷을 하나 골라 선물했다.

그러자 그는 세상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난 너한테 준 것도 없고 준비한 게 없는데.." 하며 아까 주운 조약돌을 나에게 주고 싶다고 했고, 나는 한사코 사양하며 이건 너의 운명이라 내가 받을 수 없지만 정말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렇게 소중히 주운 돌을 주겠다니, 마음으로는 눈물 팡팡 쏟는 감동이었지만, 부담스러울까 봐 꾹 참았다.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다 그의 버스가 끊길까 걱정이 됐다. 버스 시간을 확인해 보고 얼른 먼저 가라고 했더니,

"싫어. 조금 더 옆에 있고 싶어"


'응 나도야. 나는 아예 여기서 밤새고 싶어. 아니면 너를 보쌈해서 그린델발트로 데려가던지.'

튀어나올 뻔한 말을 꿀꺽 삼키고, 누나답게 의젓하고 쿨한 모습으로 기차를 탔다. 바이바이 내 잠깐의 사랑. 우리가 우연이라면 좋은 추억으로 남을 테고, 운명이라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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